• 번호 : 39900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2/09/14
  • 조회수 : 1,435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30) - 두 개의 천국 속에 살다 : 황일광(시몬)

황일광(시몬)처럼 삶을 기쁘게 살다간 분도 드물 것이다. 그는 백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아주 어렵게 보냈지만 천주교를 알고 나서는 모든 것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존재였다. 가축을 잡는 백정이란 사람들은 생명을 죽인다 하여 어찌나 천한 대접을 받았던지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오죽하면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없어진 일제강점기에도 백정 출신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생들이‘우리가 아무리 천한 일을 해도 어찌 백정을 손님으로 받느냐’며 거부할 정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으랴.

황일광은 입교한 후에 상상도 못할 대접을 신자들로부터 받았다. 그가 백정임을 알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주었고 양반 집 방에까지 초대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안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격이 명랑했던 황일광은 이런 변화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황일광은 서울에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하인으로 있었는데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이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포졸들이 나를‘남원’에서‘옥천’으로 데려왔네.”하고 농담하였다. ‘나무’(남원)하러 나갔다가‘감옥’(옥천)에 갇힌 것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황일광에게 형벌을 가하며 신앙을 버리라고 아무리 강요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고향인 홍주로 보내져 한겨울인 1월 30일에 참수를 당하여 두 번째 천국으로 갔다.

황일광을 생각하노라면 그의 명랑한 태도와 신앙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럽고, 그를 받아들여 자신들과 똑같이 대했던 신자들도 존경스럽다. 아무리 같은 신자라도 조선시대의 사회 풍습 안에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천민을 신분의 벽을 넘어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평수만 달라도 서로 구역 모임이 어렵다는 현재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07월 29일자 대전주보 : 제2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