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에는 흔히“그 집 땅 밟지 않고는 그 동네 못 지나가”라는 식으로 큰 부자를 묘사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안이 바로 그러했으니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대략 15,000마지기(9,900,000㎡)의 토지를 소유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고민 없이 살아가는 집안은 없다. 유항검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은 지위는 가지지 못했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되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南人)에 속해 있어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데 자주 제약이 따랐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는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학문으로 여기던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신앙 수용의 계기가 되었다.
유항검은 1784년 어느 날 경기도 양근에 사는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을 찾아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을 처음 보았다. 이후 그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통해 천주교를 배우고 그를 대부로 하여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호남 최초의 신자가 된 유항검은‘호남의 사도’로서 고향에 복음을 전하여 전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의 집안은 무사할 리 없었다. 그를 비롯하여 온 집안 식구들과 그의 영향으로 신자가 된 무수한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다. 유항검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모진 형벌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나 그에게는 다른 죄목도 추가되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집에 모셨던 점, 서양의 배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혐의도 추가되어 역적의 죄로 다스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의 형벌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식솔들은 함께 처형되거나 각 지방 관청의 노비로 팔려갔고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더하여 그가 살던 집은 대역죄인의 집이라 하여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집을 수몰시켜 버리는 형벌인 파가저택(破家宅)도 추가되었다.
유항검의 고향에 조성된 초남이성지(전북 완주군)에는 그의 집터에 상징적으로 작은 연못을 파놓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박해의 잔혹함을 떠올리며‘어쩌면 저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들지만, ‘유항검의 집안은 그 집마저도 물로 씻어 세례를 받았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06월 17일자 대전주보 : 제21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