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도의 공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이지만 이번 하느님의 종 125위 중 공주에서 순교하여 대상자가 되신 분은 두 분뿐이다. 순교하신 그 자체로 큰 의의가 있으나 모두 대상자로 삼을 수는 없어 행적 기록이 풍부한 분들만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이국승(바오로)은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충주는 남한강의 상류에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강을 이용하여 여주, 양평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뱃길이 곧잘 이용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국승은 경기도 양근(양평)땅의 유명한 학자이며 초기 교회 지도자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찾아가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국승의 처음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고 1795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배교한 후에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결혼을 하면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하였다. 지금 같으면 수도자의 길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후 한양으로 이사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이국승이 문초를 받는 과정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고문을 받을때에는 고통을 참지 못해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가 끝나면 다시 회개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가 다른 배교자에게 권고한 말대로“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의 진심이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나약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과 같이 되어”고칠 수가 없다고 말한 후 순교의 길을 갔다.
김원중(스테파노)은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라는 궁벽한 마을 출신이다. 발래기는 비신자들과 섞여 사는 마을이어서 이미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따라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가에서 마을로 전갈을 보내어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증거로 성경이나 교리책을 갖다 바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원중과 십여 명의 교우들은 아무 책도 지니지 않고 관가로 가서 자신들이 신자임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눈길을 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책을 관가에 갖다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이국승에게 긁어 부스럼 만들면 자신들이 피해를 보니 그러지 말라며 만류하였다. 비신자들 역시 함께 나서서 그리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다.
내 자신 안에서건, 아니면 밖의 사람들에의해 서건 우리 주변에는 나약함과 강인함, 이도 아니면 그저 평범한 마음들이 혼재되어 있다. 어떠한 때를 만나던“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05월 20일자 대전주보 : 제2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