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38846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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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19) - 주보 성녀의 삶을 따라 : 한 여름의 백일홍(百日紅) : 김연이(율리안나), 한신애(아가타), 이현(안토니오)

김연이, 한신애, 이현 세 순교자는 1801년 7월 2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즉 모두 9명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7월이면 한 여름으로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계절이었다.

조선은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국가여서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만물이 생장하는 봄과 여름에 사람을 죽이면 죽은자의 원기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쳐 자연재해가 발생한다하여 사형도‘때를 기다려’(待時) 추분(9월 23일경)이 지난 다음에 집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의 경우‘때를 기다리지 않고’(不待時) 집행하였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오히려 더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풍습을 감안한다면 7월 2일에 함께 순교한 분들은 그만큼 중대한 범죄자로 다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사학한 가르침(邪敎)으로 규정하고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교우들 중 지도자나 양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엄히 다스렸다. 이현은 양반이었고, 김연이와 한신애는 신분은 높지 않으나 여성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되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여성들은 이름 없이 살아갔는데 김연이와 한신애도 그러하여 김연이는 율리안나, 한신애는 아가타라는 세례명만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둘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사형판결을 받는 동안 소송을 위해 임시로‘연이’와‘신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 이름으로 우리는 그분들을 기억한다.

한 여름이면 배롱나무라고도 불리는 백일홍이 빨갛게 꽃을 피우는 때이다. 이 나무는 껍질이 없는 것처럼 매끈하여 사람으로 치면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뜨거운 여름동안 두 달이 넘게 오래도록 꽃을 피우기에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린다. 한 여름에 꽃을 피우고 있는 이 나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순교자들이 생각난다. 껍질도 없어 보일 만큼 헐벗었으되 뜨거운 열기를 이기고 빨갛게 오래도록 꽃을 피우는 모습이
참으로 그분들을 닮았다. 화려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피어있는 모습은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서는 이름 없이 한 생을 살아온 김연이(율리안나)와 한신애(아가타), 양반이라는 좋은 명함은 있었으되 다 사라지고 이현(안토니오)으로만 기억되는 이분들은 한 여름에 핀 백일홍들이다.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곧 피어날 백일홍을 보며 이분들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로 인해 우리가 신앙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05월 13일자 대전주보 : 제21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