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38279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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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15) - 정복혜(칸디다)와 정철상(가롤로)

같은 정씨 성을 가진데다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함께 순교하신 분들이어서 가족 관계라도 될 듯싶지만 두 분은 출생지, 거주지, 신분, 성별까지 모두 달랐다. 같은 길을 걷다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사학징의』라는 책의 기록에 따르면 정복혜(칸디다)는“시골의 천한 노파”로 두 번 결혼하였으나 모두 남편을 잃은 처지여서 흔히‘정 과부’라 불렸다. 1790년 무렵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녀는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아 하고 교회 서적을 팔았을 뿐만 아니라 교리를 강습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런 역할을 하다 보니 남자, 여자를 고루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조선의 법도에서 친척이나 잘 아는 사람이 아닌 남녀가 서로 만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그녀의 사형선고문에는“너는 남자 교인들과 얽혀서 부녀들을 가르쳤고, 사악한 책과 더러운 물건들을 모아… 사학을 전파할 계책을 삼았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적혀 있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정철상(가롤로)은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고 그 삼촌은 다산 정약용(요한)이다. 아버지에게 신앙을 배운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가 투옥되자 감옥 근처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캐는 과정에서 아버지 정약종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관원들은 아들 정철상을 잡아들여 대신 심문을 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아버
지처럼 꿋꿋하여 아무런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정철상은 옥에 있는 동안 짚신을 삼아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다. 법적으로는 죄수에게도 약간의 먹을 것이 주어지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옥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먹을 것을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먼저 순교한 이후 집안이 풍비박산 되었으니 누가 옥바라지를 해주겠는가?

1801년 5월 14일 정철상은 한 달 전인 4월 8일 아버지가 먼저 참수당한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날 모두 6명의 교우들이 함께 참수되었는데 정복혜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날 동행이 되었다. 시골의 천한 노파인 정복혜와 나이는 모르지만 20대의 양반 청년이었을 것이 분명한 정철상이 친구(敎友)가 되어 같은 길을 갔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04월 15일자 대전주보 : 제21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