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17279
  • 글쓴이 : 솔뫼성지
  • 작성일 : 2008/08/13
  • 조회수 : 4,385

Agnus * 황무실 사적지

1791년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5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파묘 사건으로 촉발되어 내포에서 2천명에 가까운 신자가 해미 등지에서 순교한 <무진박해>까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으로 2008년 8월 15일 교구 청소년대회를 시작하며 실시하는 도보성지 출발지 중 하나이다. *** 1. 황무실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 중의 하나로 황무실 인근에서 살다 1793년 1월 28일 홍주옥에서 동사형(凍死刑)으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하여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2. 그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등 내포 전역을 휩쓴 무서운 박해 중에도 황무실 신앙 공동체는 계속 보존되었다. 3.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신부의 스승인 메스트르 신부는 1853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1856년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으며 고아사업과 배론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맡아 사목하다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4. 조선교구 4대 교구장 장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을 8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그 중 충청도 홍주지방을 ‘성모성탄’ 공동체로 지명하여 1857년에 조선교구 부주교로 성성된 다블뤼 주교에게 맡겼다. 당시 홍주 지역의 교회 공동체는 황무실이 중심지였다. 5. 1861년 조선 입국에 성공한 홍 랑드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파견되어 한수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무실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활동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충청도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6.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 민 위앵 신부는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위앵 신부는 1865년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신리 성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유럽에서 당신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7. 신리 성지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아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이존창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 및 덕산 황무실, 솔뫼 등 초기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던 곳과 연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 서부지방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수로를 통하여 이어져 있었고, 신리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8. 1890년 8월 조선교구장직무대행인 코스트 신부는 황무실 공동체에서 뻗어나간 양촌(예산 고덕면 상궁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퀴를리에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게 하였고, 예산 간양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파스키에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868년 해미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낸 무진박해 이래 22년만에 2개의 정식으로 본당응 충청도에 설립하였다. 9. 이 같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가 있던 황무실 사적지는 1970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성당으로 이장하면서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다 돌보지 않는 사적지가 되었다. 지금은 성물(십자고상, 묵주)을 간직한 무명의 순교자 또는 신자들의 묘지들이 사적지를 지키고 있다. 황무실은 외교인의 가족묘역으로 변해 비신자의 소유지가 되어 있다. 1970년 이전까지 합덕 교우들은 솔뫼성지처럼 황무실을 신앙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자주 순례하며 신부님들과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다. 어른 교우들은 자녀들에게 황무실 공동체에 대하여 들려주곤 하였다. 10. '황무실'은 달레 교회사나 관변문서에서 소위 <덕산> 또는 <홍주> 등으로 표기 되어 있다.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11. 사리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 올 수 있을 때는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쳐 서울 서강까지 왕래하였다. 하지만 조금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한양 교우들의 소식을 전해듯기 쉬운 길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