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4260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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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지와 연계하는 '평화의 섬

[신향토기행/함께 사는 세상 제주(47)]
가톨릭 성지와 연계하는 '평화의 섬'


입력날짜 : 2006. 11.10. 00:00:00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 전시실 내부. 김대건 신부의 제주 표착 사실에 대해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시발점

  우리나라 가톨릭 신앙. 17세기 초 조선조 학자들이 한역 서학서와 세계지도를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들여온 마테오 리치 신부의 <天主實義> 내용이 실학자 이수광(1563∼1628) 이 쓴 <지봉유설>에 소개되면서 천주교 신앙이 서양 학문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8세기 말에 와서 정약전·정약용·이벽 등 남인 실학자들과 함께 '서학교리연구회'를 열게 된 권철신(1736∼1801) 등에 의해 신앙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천주교 신앙은 정조 7년(1783)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갔던 이승훈이 교리를 받고 이듬해인 1784년, 예수회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전교에 임하게 되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1784년 겨울에 수표교(水標橋·현 서울 중구 수표동) 인근에 있던 이벽(1754∼1786·'聖敎要旨' 저술)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세례식이 베풀어져 이벽·정약용·권일신 등이 이승훈을 통해 세례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창설'이 이뤄졌다. 수표교 공동체가 지속되면서 신자수가 많아지자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성당 부근) 김범우의 집이 집회장소로 이용되어 명례방 공동체를 이뤄 나갔다. 18세기말 조선의 신자수는 약 1만명이라 기록되고 있다. ('제주천주교회 100년사' p.39∼41)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 세계성체대회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된 신앙전파의 땅이 숱한 박해 속에서 순교로 얼룩져 있음을 알고서 한국 땅에 입맞춤하던 모습이 전 세계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조선조 103위 순교자(한국인 신부 1명과 평신도 92명 등 93명,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주교 3명과 신부 7명 등 선교사 10명)에 대해 성인·성녀 시성을 선포했다.

#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천주교 초기 100년 역사는 박해와 순교사라 할 만큼 시련은 혹독했다. 최초의 천주교 박해로 기록되는 정조 15년(1791)의 신해교난을 시발로 을묘박해(정조 19년·1795), 신유박해(순조 1년·1801), 정해박해(순조 27년·1827), 기해박해(헌종 5년·1839), 병오박해(헌종 12년·1846), 경신박해(철종 11년·1860), 병인박해(고종 3년·1866)로 이어졌다. '하느님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보편교회 사상이 뿌리내리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토양이 조선왕조였던 셈이다. 권세가들의 권력다툼 틈바구니에서 피해는 더욱 커졌다.

  그런 중에도 1831년 9월 9일, 교황청에 의해 조선 포교지가 독립 교구로 설정되었다. 1835년 말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했는데 맨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P. Maubant·羅) 신부는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에 있는 조선 신학교로 보냈다. 1844년, 김대건과 최양업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eol·高)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8월 17일 교우촌 김가항(金家巷·현 상해시 푸동신구) 소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서 서품받았다. 8월 24일에는 횡당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새 신부, 조선에서 함께 갔던 11명의 신자 등 일행 14명은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페레올 주교는 선명을 여행자 주보 이름을 따 '라파엘호'로 명명했다.

  황해 횡단 항로로 마포 나루를 향해 키를 잡았던 라파엘호는 역풍과 해류 영향으로 인해 표류하면서 제주에 표착하게 되니, 1845년 9월 28일의 일이다. 라파엘호가 정박했던 곳은 '제주도에 딸린 한 작은 섬(차귀도)으로 주민들이 살던 곳'이었고, 배를 수리한 곳은 차귀도 맞은 편에 있는 '용수 포구'로 정리되고 있다.(위의 책, p. 57) "이 나라 남쪽에 영국 배가 한 척 나타난 것으로 인하여 조정은 공포에 싸여 있었고"라는 페레올 주교가 남긴 기록을 볼 때 1845년에 우도에 정박하여 해심측정에 임했던 영국 배와 관련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제주 유배중에 있던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 권돈인과 주고받은 편지글 속에서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박해 속의 가톨릭 신앙 전파

  예견치 못했던 성 김대건 신부의 제주표착 사실에 대하여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있다. 제주 땅에 내려진 큰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 그뿐 아니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선교사 다블뤼 신부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한국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한 천주교회 사적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일행이 제주에 머문 시간은 확실하지 않으나 제주를 떠나 강경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10월 12일로 확인되고 있다. 성직자로서 사목활동을 펴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가 한창이던 6월 5일에 체포되어 9월 16일 한강 백사장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직전 최후 증언.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라는 내용이다. 믿음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안창흡/ 한라일보 프리랜서 rijin88@naver.com>

 

[미니 인터뷰/제주천주교회사 연구 박찬식박사]"제주지역사회와 결합된 천주교회사 연구 필요"

            "제주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발전해 온 과정을 집대성한 <제주천주교회 100년사>가 지난 2001년에 발간된 바 있습니다만, 교회와 제주지역사회의 관계성에 대하여 좀더 연구를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연구과제 수행에 바쁜 박찬식 박사(제주대탐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제주 4·3연구소 연구실장)를 만나니, 미진한 부분에 대한 연구 의욕부터 밝힌다.

  제주인구의 10%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자 수 분포도를 볼 때, 교세 발전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연구를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는 얘기였다. 1901년 신축교안 이후에 천주교회가 제주지역사회에 어떻게 기여해 왔고, 지역민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재조명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전파 초기에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조선조 왕실을 둘러싼 권력암투와 함께 천주교 자체적으로는 토착화 실패를 큰 원인으로 풀이하고 있다. 제주지역 전래과정에 있어서도 역시 토착화에 미진한 부분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

  "1930년대부터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됩니다.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들이 제주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1936년에는 사목권이 골롬반회 선교사들에게 완전히 이양되었죠. 당시 제주와 홍로 본당 신자 수가 529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P. J. 맥그린치 신부의 이시돌 개척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전쟁 후 간난의 세월을 이겨내는데 기여한 제주 천주교회의 모습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종교 전파에 있어서 문화적 측면의 동화와 결합이 중요한데, 그것은 신자들의 자세와 삶 자체에서 증거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젊은 역사학자의 역할에 큰 기대를 갖게 했다.  

<안창흡 / 한라일보 프리랜서 rijin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