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란, 없는 사람의 형제가 되는 것" | ||||||||||||
| 하마리아 마산가톨릭여성회관 초대관장, 천주교 마산교구 초청으로 14년 만에 마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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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정 기자 june20@idomi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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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내가 한 일을 부풀려서 쓰지는 마세요. 그건 나 개인이 한 일이 아니고 늘 주교님과 의논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일입니다. 성당을 통해 내가 도구로 쓰였을 뿐입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33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다 지난 1992년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던 하마리아 관장은 천주교 마산교구 설정 40주년과 마산가톨릭여성회관 설립 30주년을 맞아 마산교구의 초청을 받아 14년만에 다시 '제2의 고향' 한국땅을 밟았다. 대구효성여대 영어강사로 1959년 처음 한국행 선택 본 성은 '하이센베르게르'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독일식 이름이라 '하'씨로 바꿔 '하마리아'라는 한국식 이름을 쓰고 있다. 하마리아 관장과 한국에서 인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번 방문을 알고 얼굴을 보고 식사라도 함께 하기 위해 계속 연락하는 통에 공식 일정 외에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라며 극구 자신을 낮췄다. 지난 1959년 선교활동을 위해 어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찾아 한국에 온 하마리아 관장. '한국'에 대해서는 막연히 '전쟁이 났던 나라'라고만 알고 있던 하마리아 관장이 한국을 선택한 데는 대구교구 서정길 대주교와 당시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수환 신부(현 추기경)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혹시 평신도로 일할 것이 있으면 한국에 와달라'고 서 대주교님이 말씀하셨죠. 이후에 대구에 있는 효성여대에서 영어와 불어·독어를 가르칠 강사를 찾고 있다고 당시 대구에 계시던 오스트리아인 신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래서 영국 출신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했던 23살의 양수산나와 함께 한국으로 왔어요." 초창기 한국말을 못했던 하마리아 관장은 대학 기숙사에 살며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배웠다. "하루는 학생들과 시내에 나갔다가 조금 늦게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어느 집 대문 앞에 애가 앉아 있는 겁니다. 꼬치꼬치 물어보니 갈 곳이 없는 구두닦이 아이였어요. 분명히 한국에 온 목적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주위의 도움으로 낡고 허름한 집을 하나 마련해 16명의 갈 곳 없는 구두닦이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대구에서 9년을 살며 SOS어린이마을 건설에도 앞장섰던 하마리아 관장은 1966년 마산에 가톨릭교구가 설립되며 초대 주교로 부임한 김수환 주교(현 추기경)의 '꼬심'을 받게 된다. 김 주교는 가포 결핵병원에 환자들을 위한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봉사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대구의 일을 정리하고 마산에 온 것은 68년. 그 사이 김 주교는 서울로 떠나고 없었지만 하마리아 관장이 평생을 헌신한 '어려운 이웃'은 마산에도 역시 넘쳐나고 있었다. "68년 6월3일부터 76년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 결핵환자가 많아서 그 곳에서는 환자들이 6개월밖에 있지 못했어요. 병원을 나오면 갈 곳도 없었죠. 천주교를 알리는 것보다 당장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전후 국가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하마리아 관장도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다녔습니다. 약사한테 가서 싼값에 약을 달라고 하고, 환자들이 죽을 때는 옆에 있어주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에 상황을 알려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여 병원 내에 도서실도 만들 수 있었죠. 600명의 환자 중 많을 때는 천주교 신자가 150명까지 있었지만 가톨릭 신자만 도움을 받는 건 아니었죠." 병원을 나온 사람들을 위해 가포 고개 넘어 방이 몇 개 있는 집을 얻어 같이 생활하던 하마리아 관장은 마산결핵병원에 있다가 진영의 천주교 성모병원으로 옮긴 의사를 환자 회장과 함께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66년 마산가톨릭교구 설립 후 가포결핵병원 내 성당서 봉사 "병원을 나온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최 선생이 '여기 병원에 땅이 있잖아. 뒤에 집 하나 지으면 돼'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결핵 환자들을 위한 병원 별관이 진영에 지어졌습니다. 한동안 마산과 진영을 오가며 일 했습니다." 가포에서 일할 때 마산시에서 하마리아 관장의 봉사를 알게 돼 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알고 지냈던 마산시의 계장이 하루는 하마리아 관장에게 상담을 해왔다. "수출자유지역도 생겼고 한일합섬에 학생들이 '억수로' 많이 일을 하는데 그런 애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더군요. 주교님께 말씀드리니 참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회관 이야기가 나왔죠." 마산가톨릭여성회관을 만들 때는 천주교 마산교구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부녀회·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독일 미세레오 재단 등 해외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1대와 3대 관장을 지낸 하마리아 관장은 15∼16세에 불과하던 여학생들이 성인이 돼 실질적으로 필요한 교육, 즉 결혼 준비에 필요한 교육으로 요리·꽃꽂이·한글 등을 가르쳤다. 강의를 직접 하기도 했는데 하마리아 관장이 맡았던 것은 '노동자 교실'. 하지만 요즘의 '노동자 교실'과는 많이 다르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보면 안됩니다. 자신있게 살아나가도록 하려면 자기가 온 세상을 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즉 가치관 함양 교육이었죠.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노동자로서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외에도 하마리아 관장의 손길이 미친 곳은 많다. 결핵 환자들의 자활을 위해 고성에 만든 '예수작은마을'은 '한국의 좋은 사람'에게 땅을 받아 이룩했고, 결핵에 걸린 3남매를 위해 아파트를 얻어 함께 산 것은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하는 '그룹홈'을 운영하는 '마산 한울타리'의 효시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하마리아 관장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92년. 손 떨림 등 병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번 한국 방문은 교구 설정 40주년 행사를 하는 천주교 마산교구의 초청을 받아 이루어졌다. 초기 22명에 불과했던 사제가 지금은 140여명으로 늘었고 신자 수도 엄청나게 많아졌으며, 한국 전반이 발전을 이루었다며 14년만에 보는 한국 모습에 흐뭇해 했다. "종교와 봉사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상황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없는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들인데 원수지고 사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마산과 대구에 오래 살아서인지 하마리아 관장은 거의 표준어에 가까운 한국말을 구사하면서도 대화 틈틈이 '사투리'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우리는 친구 아입니꺼." 하마리아 관장이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 "나 혼자 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천주교 마산교구 등 모든 사람이 한 일입니다. 난 교구의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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