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3357
  • 글쓴이 : 홍보국
  • 작성일 : 2006/09/05
  • 조회수 : 3,351

<9월> 지학순주교(원주) (강원도민일보)

<9월> 지학순주교(원주)
반독재 민주화운동 정신적 지주

 "이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곳이지만 저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중략) 억울하게 갇혀 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전달한 옥중 서한문-

'원주선언' 발표 '민주구국선언' 승화
지역 육영사업·인권보호운동 큰 기여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결성 이끌어

예비 신학생 시절 평양성모학교에서 지학순 주교(오른쪽·16세)가 교우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유신정권 시절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 주교는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 정신적 지주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의 모태가 된 '원주선언'의 중심에 선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과 개신교회가 함께하는 '전 민중과의 일치'를 호소하며 군사 독재 정권과 소수 특권층의 경제적 착취를 개탄하는 등의 민주화로 일생을 불태웠다.
 지학순 주교는 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동에서 지태린·김태길씨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중화 천주교회에서 1924년 세례(세례명 다니엘)를 받았다.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휴학을 했으며 이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 편입해 수학했다.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월남,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해 수학 중 국군에 입대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1952년 횡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하면서 복학한 뒤 학업을 마치고 부산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군종신부로도 봉직했다.
 로마 울바노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강단에 섰으며 1965년 주교로 서품돼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지난 77년 9월 9일 은경축(사제서품 25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한 지학순 주교(사진 가운데).
 그해 9월 원주 우산동에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육영사업을 시작한 지학순 주교는 반독재와 부정부패 척결과 양심수 석방 등의 민주화 운동을 비롯해 노동자 교육, 지역사회 문화활동, 신용협동조합운동, 수재민 구호활동, 결핵퇴치 등 인권보호운동에도 참여했다.
 또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1972), 한국노동교육협의회 회장(1973), 김지하(본명 김영일) 구출위원회 위원장(1977), 한국 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가톨릭맹인선교회·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담당주교(1983~1984), 남북한 장애인걷기운동본부장(1991) 등을 맡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은 암울한 시련으로 되돌아 왔다.
 원주 민주화운동을 이끈 지학순 주교는 장준하, 함석헌, 김지하 등과 함께 1974년 유신헌법 개헌 청원 운동을 주도했고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됐지만 이사건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특히 지학순 주교 투옥 이후 1976년 1월 23일 원동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합동기도회에서 원주선언이 발표됐으며 같은 해 명동성당 3·1 기념미사에 참가한 김대중, 윤보선, 이우정, 함석헌, 문익환 등 당시 재야 정치권의 '민주구국선언'으로 승화됐다.
 한국천주교회 인권운동의 선봉장이었던 지학순 주교는 192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993년 타계할 때까지 정의를 위해서 십자가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최초의 운동가' 신부였다.
 원주시민과 도민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을 위해 민주화 운동과 구국운동의 길을 걸었던 지학순 주교의 숭고한 '정의'는 아직도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박종락 원주문화원장

"정의사회 구현 뜻 이어야"

 지학순(池學淳 1921~1993)주교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1921년 9월 9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동에서 아버지 지태린과 어머니 김태길의 자녀 6남매중 넷째로서 2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 2월 25일 중화 천주교회에서 세례(세례명:예언자 다니엘 DANIEL)를 받고, 1936년 3월 서울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을조(乙組, 小神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40년 병으로 중퇴한 뒤 1943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德源神學校)로 편입해 중등과·고등과·철학과를 거쳐 신학과에 진학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해주에서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동료 윤공희(尹恭熙)와 함께 월남에 성공, 다시 성신대학(聖神大學 :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편입했다.
 6·25 때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1952년 2월 횡성(橫城) 전투에서 부상으로 인해 후송돼 병원에서 제대하였다.
 이때 병원에서 동생 지학삼을 극적으로 만나 제대 후 즉시 복학하였다.
 그 뒤 성신대학에 복학하여 1952년 12월 15일 부산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1953년에 부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군종신부로 봉직하다가, 청주 북문로본당(北門路本堂) 보좌신부를 역임하고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Propaganda)대학에 유학, 이곳에서 교회법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귀국하여 천주교 청주교구장 비서 신부로 봉직했다.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草場洞本堂)주임신부을 거쳐 1965년 교황 바오르 6세의 교황청령 2196-66에 의해 천주교 춘천교구로부터 분활돼 창설된 원주교구가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되고, 그 후 원주교구의 교세 신장과 발전에 주력하는 동시에 여러 교육·복지 기관들을 설립, 사회봉사활동에 노력하였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도입했다.
 1967년 9월 26일 학교법인 진광학원(진광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1969년에는 카톨릭 노동청년회(J.O.C)총재 주교가 됐으며 이듬해 한국 군종후원회(軍宗後援會) 초대총재 주교에 추대되었다.
 1970년 원주문화방송 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1971년 국제 사면 위원회 한국 위원회 이사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또 1972년 8월 교구내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설치해 재해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사회·정의·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총재, 한국노동교육 협의회 회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4년 7월 23일 발표한 양심 선언은 천주교 고위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유신체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85년 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 휴전 후 처음으로 북한에서 공식 미사를 봉헌하고 누이동생 지용화를 만났다.
 짧은 해후를 아쉬워하며 예순이 넘은 누이동생을 껴안은 사진은 온 국민에게 이산의 아픔을 생생하게 아로새겼다.
 이후 1990년 11월 지병으로 인해 교구의 모든 행정을 김지석(金智錫) 부주교에게 위임 한 뒤 1993년 3월 12일 0시 40분쯤 72세 일기로 선종하시어 3월 16일 제천 배론성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1997년 그의 뜻을 잇기 위한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만들어져 매년 정의평화상이 수여되고 있다.
원주/윤수용 ysy@kado.net 
기사입력일 : 2006-08-31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