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얼굴 |
좋은 벗이 건네준 달력이 제 방에 걸려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달력입니다. 아주 간략한 드로잉들이지요.
그 그림 가운데 얼굴 모양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아래에 ‘바보 김수환’이라고 써놓은 게 있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존경받고, 지혜로운 분으로 꼽히는 김 추기경께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고 ‘바보’라고 한 것입니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뛰고,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권위가 중시되는 가톨릭 지도자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서가 아니라 ‘바보’로 자신을 그린 것에서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청량감을 맛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을 ‘우’(愚)는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란 뜻도
주교관앞에서 웃고있는 김수환추기경 |
|
|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먹을 것 떨어지면 또 오게나”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세상천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덕숭산 정혜사에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공양간에 몰래 들어가 조심스레 쌀가마를 들어냈다. 들어낸 쌀가마를 지게에 지고 일어서려 했지만 쌀가마가 너무 무거웠던지 도둑은 일어서지 못해 쩔쩔맸다. 그런데 끙끙대고 용을 써도 꼼짝도 하지 않던 지게가 어느 순간 번쩍 들렸다. 누군가 지게를 살짝 밀어주지 않고선 이럴 수가 없었다. 도둑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한 스님이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게.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또 오게나.”
천진불 혜월 선사였다. 혜월이 마지막으로 머문 것은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백양산 선암사였다. 혜월은 절 대중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는 곳마다 산비탈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간 선사’로 불렸다. 그가 밤낮으로 몇 년을 일해 산비탈에 논 열 마지기를 개간했다. 산이 가팔라서 논이 거의 없던 아랫마을의 한 사람이 이 논을 탐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그 논을 팔아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들은 혜월이 논을 팔았다. 그런데 혜월이 원주(절 살림을 맡은 승려)에게 내놓은 돈은 논 여섯 마지기 값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이 순진무구한 혜월을 속인 것이었다. 절 대중들은 논 열 마지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일을 생각하며 분을 이기지 못해 혜월을 탓했다. 그러자 혜월은 대중공사(전체 회의)에서 “논 열 마지기는 저기 그대로 있고, 여기에 여섯 마지기 값인 돈까지 생겼으니, 더 번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다. 혜월의 계산법은 그러했다.
솔방울 딴 자루 메고 솔가지 잡은 채 벼랑에 기대 열반
어느 날 혜월이 방에서 삼매에 들어 있다가 산에 올라갔다. 혜월이 돌아오지 않자 대중들이 산에 올라가 그를 찾았다. 산에서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솔방울을 딴 자루를 메고 솔가지를 잡고 벼랑에 살짝 기대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동서고금에 찾아보기 어려운 열반이었다.
어찌 보면 ‘바보’로 불릴 법하게 평생 속고만 살아온 혜월이었다. 누구에게나 속고 산 그였지만 눈 밝은 선사들은 입을 모았다.
“귀신도 혜월을 속일 수는 없다.”
<은둔>의 ‘혜월-무소유의 도인은 천하를 활보하는데, 영약한 여우는 제 그림자에 묶여 절절 매는구나’ 편에서.
재물과 명예와 지위 등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하려는 욕망이 없고, 마침내 욕망할 ‘나’가 없을 때, 속이고 속을 자가 어디에 있을까. 지혜로운 이도 찾을 수 없고, 귀신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부처인들 찾을 수 있고, 속일 수 있을까.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 조현 기자의 휴심정 http://we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