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11739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0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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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성거산성지 학술세미나

사진설명 : “목천 지역과 천주교 성거산 순례지”세미나에서 주제발표 후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서종태(호남교회사연구소), 김정환 신부(대전교구사 연구소장), 정지풍 신부(성거산 성지 주임), 백의영(사회 백석대교수),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김수태(충남대학교수)


순례지이자 천안 교회의 못자리가 된 '성거산 교우촌'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대전교구 성거산성지(담임 정지풍 신부)는 1일 천안시 불당동 청사 중회의실에서 성무용 천안시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목천지역 천주교 성거산 순례지'를 주제로 성거산 순례지의 문화재 지정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차기진(루카)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은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라는 제목의 주제발표를 통해 "목천 교우촌은 소학골과 서들골을 중심으로 6개 교우촌이 기록에 나타나는데 지금까지 주장은 1839년 기해박해 직전부터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 내포 신자들이 북쪽으로 피신하면서 교우촌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성거산순례지는 내포에서 진천 동골, 배티성지, 경상도까지 연결되는 교우촌 연결선상에 위치, 사목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목천지역 순교자는 1866년말 칼레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한 뒤 나타나는데, 1871년까지 확인된 순교자만 21명에 이르고 이들 중 1866년말 소학골에서 체포돼 공주감영에서 순교한 순교자 4명은 고향인 사리목에 안장됐다.

 김수태(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조선 후기 목천지역 사회 동향'이라는 발제를 통해 안정복의 읍지 「대록지」와 황윤석의 「이재난고」를 근거로, 1800년대 초 천주교 신자들이 목천현에 교우촌을 형성한 것은 고을 수령의 권한과 사족세력이 약화돼 안전한 피난처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지풍 신부는 '박해 이후 목천교회사와 성거산 순례지'라는 발제를 통해 성거산 교우촌은 천안에 본당이 설립되는 뿌리 역할을 했고,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돼 있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성역화 사업은 필연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병인박해 150주년인 2016년까지 연차적으로 △성지의 문화재 지정 △옛 소학골 교우촌 대지 및 기타 부지 매입 △숯가마 재현 및 칼레 신부 사제관 건립 △피정의 집 및 박물관, 야외음악당 건립 △교우촌 입구 주차시설 조성 △야생화 체험장 및 계곡 묵상의 길 조성 등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학술세미나에는 1866년 말 순교한 최천여(베드로) 순교자의 5대 손으로, 현재 천안시 북면 납안리(옛 소학골 교우촌터)에 사는 최병기(시몬)씨가 참석해 1959년 미군 비행장 설치 때 순교자들의 묘지를 이장하던 상황을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