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68
  • 글쓴이 : 장병찬
  • 작성일 : 200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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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더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3:30)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 아래 글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영성자료 중 성 아우구스띠노와 기도 체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분이 그들과 함께 하루 밤을 머물며 음식을 함께 먹도록 설득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부터 그들의 눈이 밝혀져 '예수이시다!'고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을 '믿는' 눈으로 보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모든 이들 안에 그리스도를 찾으며 .... 우리 가족과 직장 동료들과 보잘것없는 이들 중에서까지. "사랑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 여러분 안에서 사랑이 자라나는 만큼 그 사랑이 여러분을 변형시켜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편상해 49,5) 오늘날에도 우리 개인 삶에서 제자들의 체험 못지 않게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이 개인 신앙의 체험밖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마태오 29:2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다는 느낌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그 때에 그분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나셨으며 우리와 똑 같이 심장이 고동치고 있습니다 그전에 한번 그분의 제자들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오 16:15) 하십니다 나에게 또 각 사람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대답하려면 먼저 우리 삶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의미 없이 타성에 젖어 습관적인 생활방식으로 지내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사회의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서 오셔서 타성에 젓은 모든 생활을 뒤집어 부수십니다. 그분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자꾸 던져 주시는 질문은 뭐니해도 '진리'에 대한 문제이며 우리 삶 자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은 이 질문에 응답하려면 우선 그리스도께서 살던 그 삶을 체험해야 하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분에게서 우리가 새로이 태어나야 되겠습니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에게 이릅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한 3:3) "....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요한 3:21).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이신 그분과 결합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은 우리의 진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모형대로 존재를 받았으며 말씀의 형상대로 지어낸 각 사람이 그 말씀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거처하시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이가 하느님께 대한 열려진 창문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가 참된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존재가 온전히 하느님께 향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늘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매혹 당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께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켜) 일깨워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 살 때처럼 이 부르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에게 오시며, 심지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과 그의 진리를 찾으려면 좌절과 실패밖에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향한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를 꼭 닮을 때 우리의 진리이신 그분의 본이 우리의 표본이 되실 것 입니다. "진리를 구하려면 길을 따르십시오. 길은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가십시오 - 그 길을 꼭 가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십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십시오. 육신을 취하신 말씀을 통해 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께 가십시오." (요한복음 강해 XIII,4) "하느님께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이를 수 없는 하느님께 도달할 것입니다." (시편상해 134,5)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동행자가 됩니다. 우리 마음 깊은 데서부터 엠마오 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복음 기사를 실천하게 되면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뒤 그의 제자 두 명이 공포에 떨며 예루살렘을 달아나고 맙니다. 절망과 슬픈 마음으로 자기의 고장인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우리 또한 근심과 걱정을 겪을 때 더 이상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위급한 때 우리는 홀로 순례여정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길에서 그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그의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물어보셨는데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루가 24:17) 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대목을 잘 들으면 배울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시지만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 했습니 다. 길이신 이분이 이제 그 길을 동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참된 길을 걷지는 못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에 그 길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 다. 그분은 수난 전에 이미 이 모든 것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알려주셨지만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설교 235, 1-2) 그렇긴 하지만 아직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추억이 남아 있기에 그들이 함께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이런 얘기를 하며 토론을 하고 있는데 친히 다가오시어 그들과 동행 하시게 되었다"(루가 24:15). 사실 어떤 때에는 단순히 누군가와 얘기를 함으로써 상대방을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와 함께 얘기를 나누려면 먼저 그를 믿는 것입 니다. 서로간에 이런 믿음이 없으면 서로가 말 한마디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침묵을 지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기 시작하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우리를 믿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담과의 대화를 먼저 시작하시며,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런 대화를 통해서 우리를 질문하시고 도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 에게 하신 질문처럼 하느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은 우리 또한 고려하지 못 하는 상황들입니다.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루가 24:17)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루가24:21). 이 제자들이, 어떻게 그 희망을 걸었다가 잃었습니까?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지 만 그들 안에 희망이 죽었단 말입니까? 그들의 눈 바로 앞에 나타나셨지만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의 몸을 그들에게 보여주시지만 그들에게 아직 감춰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그들에게 자기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의 질문을 듣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분이 그들 뒤로부터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더 멀리 다른 길로 가시려는 척하시는데 사실은 그분이 그들을 인도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분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었다.'"(루가 24: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당신을 기억하도록 초대해 주셨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의 민족들의 행위와 생활방식을 흡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도, "이스라엘아, 하느님이 당신들을 위해 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여라' 하셨습니 다. '기억하는 것'은 또한 모든 인류와 하느님의 대화의 표준이 되는 그분의 백성과의 계약을 되찾는 것입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루가 24:27). 예수님은 그들이 기억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예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계속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또한 기억하도록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구약과 신약 성서 사이의 흐름 이 깨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고 하느님의 말씀 또한 언제나 똑 같은 말씀 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이 명백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과의 친교를 나누게 되도록 초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친교로부터 사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한 그 사랑에 응답은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머뭅시다"는 요청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이렇게 주님을 초대했으며 그분을 모시고 대접해 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조차 그분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을 애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시듯이 그 제자에게 보답해 주시고 그들에게 자기자신을 주셨습니다. "빵을 떼어 주심으로써" 상징적 표현으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의 몸을 떼어 주신 죽으심을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만나 뵈려면 그와 같은 선물을 주고받는 은혜 바로 그 사랑을 체험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에게서 났고 하느님을 안다" (1요한 4:7)라는 그리스도의 초대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는 언제 제자들에게 자기자신을 보여주셨습니까? '빵을 떼어 주실 때'였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우리 또한 빵을 나누어 먹을 때에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처럼 그의 육신을 보지 못한 이들도 당신을 살을 받아먹었을 때 바로 그때에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우리에게서 아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이분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해서 그들이 그 자신의 부활에 대한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제자 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어 가는 자로서 살아나신 그분과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죽을 사람들이 "생명"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그들의 동반자 되어 주셨으나 그들이 아직 되살아나지 못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생명을 원한다면 그 제자들을 본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주님을 알아 뵐 것입니다. 낯선(모르는) 사람을 대접하십시오. 먼 고장을 여행하는 나그네처럼 더 멀리 가시려는 자를 붙잡아 모셨습니다. 그들이 찾아 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이미 날도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우리 와 함께 머뭅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 뵈려면 모르는 이를 꼭 붙잡 으십시오. 의심으로 인해 잃었던 바를 관대함을 통해 다시 얻을 것입니다.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나타나실 것입니다." 결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싶으면 그분이 주신 은혜인 이웃 사랑을 실천 해야겠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애덕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남에게 나아가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반성: 1) 나는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모습이나 행위나 의견을 보고 미리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입니까? 2)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존경하고 그 안에서 계시는 하느님한테서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합니까? <영적의 성장을 돕는 책은 http://예수.kr 과 http://www.catholic.to 내 말씀 메뉴 중 "신앙의 책/전기"에 있습니다. 각종 게시판과 "신앙의 글/강론/훈화"에도 많은 영적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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