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41313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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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51) - 어머니와 아들: 이성례(마리아), 최양업(토마스) 신부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공로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세상에서 공로를 쌓아야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어머니들은 바로 천당에 다다를 자격이 있다.

이성례(마리아)는 여섯 아이를 둔 어머니이다. 18살에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결혼하여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낳은 맏이가 최양업(토마스) 신부이다. 다락골에 살 때는 살림이 넉넉하여 지낼만했으나 남편 최경환이‘이런 곳에서 교우들과 교류도 없이 살아가면 신앙생활에 좋지 않다.’고하여 고향을 떠나면서 큰 고생이 시작되었다. 좋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로, 강원도로 떠돌며 생활하다가 정착한 곳이 경기도 안양에 있는 수리산이었다. 이때 15살이던 맏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성례는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세 살배기 막내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성례와 더불어 감옥에 있었는데 젖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배교하고 풀려났지만 큰 아들이 중국에 있다는 것이 알려져 다시 잡혀 들어갔다. 이후 이성례는 배교를 취소하였고 신앙을 고백하며 의연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맞섰다.

한편 옥 밖에서 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12살 둘째 아들 야고보의 활동은 참으로 대견하였다. 어머니의 사형 날짜가 결정되자 그동안 푼푼이 모은 돈을 몽땅 들고 희광이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부탁하기를“우리 모친이니 칼을 갈아 행형하되 각별히 조심해 달라.”며 단칼에 아픔 없이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서울 당고개에서 아들의 희망대로 단칼에 순교하였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며 활동하였다. 틈틈이 기록도 남겼는데 당시 교우들의 모습을 이렇게 남겼다.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 자주 그러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틀이나 사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교우들이 사제를 보기 위해서나 미사에 참여하려고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교우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교우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성 앞에 어찌 몸을 아끼겠는가! 결국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프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오늘로‘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을 마칩니다. 이분들의 삶은“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는 요리 문답의 한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이고 여러분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좋은글을 집필해주신 김정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12월 30일자 대전주보 : 제21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