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40798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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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48) - Joy, Joy, Joy : 최조이(바르바라), 이조이(막달레나), 오종례(야고보)

조선시대 천주교 역사를 보면‘召史’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흔히‘소사’라고 읽는‘召史’는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인 이두(吏讀)이므로‘조이’라고 읽어야 맞다. 조이는 과부를 점잖게 부르거나 양민의 아내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름이 아니다.

‘조이’라 불리는 과부 신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들에게 천주교 신앙이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과부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였다. 죽어도 한 남자에게만 매어있어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재혼도 할 수 없고, 어떤 직업을 가질 수도 없는 처지라서 이래저래 고달팠다. 게다가,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총각이 보쌈을 해가서 아내로 삼아도 할 말이 없을 때였으니 그 처지가 오죽했으랴.

이런 처지의 과부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성경직해 광익>>이라는 책을 보면 이 세상의 가정생활을 금, 은, 동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고 동정으로 사는 생활은 금이요, 홀아비와 과부가 재혼하지 않고 사는 것은 은이요, 부부생활은 동이라했다.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이 오히려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1코린 7,25~40)을 이렇게 설명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였던 과부로서의 삶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일깨워 주었기에 신앙생활이 그들에게는 조이(joy, 기쁨)였다.

최조이(바르바라)는 18살에 결혼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과부가 되었고, 이조이(막달레나)는 15세 때 결혼하여 2년 후 과부가 되었다. 둘은 태어난 곳이 서로 달랐지만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다 전라도에서 서로 만나 알게 되었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함께 잡혀 전주로 끌려갔다. 거기서 둘은 신앙을 버리지 않아 사형판결을 받고는 오히려 기쁨 속에 순교하였다(1840년 1월 4일).

같은 날 오종례(야고보)도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충청도 은진에서 태어나 결혼 직후 전라도로 이사하여 고산에서 살다가 1839년 7월에 전주로 잡혀 왔다. 19세의 어린 나이인지라 영장은“너 같은 어린애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만 하면 즉시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오종례는“하느님을 섬기고 난 후 제가 어떻게 형벌이 두려워서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여 그의 신앙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그는 갇혀 있던 이들과 함께 치명(致命: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침)의 길을 갔다.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말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남긴 말이다. 이 말씀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며 참 기쁨은‘어떤 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글 :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 (2012년 12월 09일자 대전주보 : 제21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