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으로 택한 곳이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갈매못순교성지


갈매못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3406)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사무실 : 041-932-1311
- F A X : 041-932-1218
홈페이지 http://www.galmaemot.kr/ 이메일 E-Mail : ssss6693@naver.com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8시, 11시 30분
평일: 오전 11시 30분(월요일 미사 없음)
500명 미사·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충남 보령에 버스나 기차로 도착-버스터미널(영보리행)-발전소-성지 정문 앞 하차
- 충남 광천에 버스나 기차로 도착-버스터미널(오천행)-갈매못 성지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갈매못순교성지 → 다락골성지 ( 약 27Km - 소요시간 7시간 )
(갈매못순교성지 → 오천항 → 청소 → 오서산 → 다락골성지)

성지소개

갈매못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과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바닷가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먼저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더 이상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에게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순명하여 두 선교사가 신리로 와서 자수하였고, 황석두 루카도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선 왕실이 경사를 앞두고 있어 서울 인근에서 피를 보는 것이 좋지 않다하여 멀리 보령 갈매못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했다.

갈매못은 수군들이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세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가 갈매못으로 이송될 때 함께 갇혀 있던 장주기 요셉도 동행하도록 했다. 이들 다섯 순교자는 갈매못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1866년 3월 30일에 처형되었다. 그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이었기에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들

聖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사진
聖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1818-1866)

프랑스 아미엥 출신. 1841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후 1845년에 페레올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그 후 21년 동안 모진 박해를 감내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었다. 1857년에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그의 '조선순교자비망록'은 훗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聖 위앵 민 루카 신부사진
聖 위앵 민 루카 신부 (1836-1866)

프랑스 귀용벨 출신. 1861년 사제로 서품된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864년에 입국하여, 다블뤼주교에 배속되어 조선말을 배운 뒤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사목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그의 짧은 사목활동도 끝을 맞이한다. "나는 젊어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나 저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못하고 죽는 것이 괴롭다". 30세의 나이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聖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사진
聖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1837-1866)

프랑스 에제크 출신. 1862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1863년에 조선으로 입국. 경기도 수원 샘골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교구 4대교구장인 장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자 계승권 주교인 다블뤼주교가 있는 충청도 합덕신리로 내려왔다.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자수하여, 다블뤼, 위앵,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聖 황석두 루카 회장사진
聖 황석두 루카 회장 (1812-1866)

충북 연풍 출신의 양반. 20세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한 천주교 선비를 만나 입교한다. 선교사들의 한문선생으로, 공동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오랫동안 다블뤼 주교님을 보필하였고 그의 저술과 번역을 도왔다 '성찰기략','신명초행','회죄직지'등은 황석두 성인의 문장으로 번역된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나도 함께 천주님을 증거하겠다"고 말하며 따라 나섰다. 성인의 원대로 다블뤼주교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聖 장주기 요셉 회장사진
聖 장주기 요셉 회장 (1802-1866)

경기도 수원의 양간 출신. 현 수원교구 요당리 성지. 1826년 영세.입교. 모방신부에 의해 전교회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신앙심과 풍부한 교리지식을 갖고 있었다. 1845년 충청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 들어 공동체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최초의 신학교인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으로서 신부님과 학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체포되었다. 1866년 3월 30일에 갈매못에서 62세로 순교하였다.


성거산성지


성거산순교자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058)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 사무실 : 041-584-7199
- F A X : 041-584-7189
홈페이지 http://www.sgm.or.kr 이메일 ccjp-sgms@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은 미사 없음)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남안성/평택 IC에서 출차: 위례사거리 좌회전 - 직진하여 성지 정상 주차장까지
- 천안 IC에서 출차: 위례교차로 우회전 - 직진하여 성지 정상 주자장까지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성거산성지 - 배티성지 (등산로)

성지소개

성거산성지사진

성거산 일대는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있었다. 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신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들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공동체였다.

성거산 교우촌은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에 와서 휴식과 사목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주변의 공주와 서천, 충북 배티, 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했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Daveluy) 주교,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Maistre)ㆍ페롱(Ferron)ㆍ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 등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거산 출신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 성거산에서 잡힌 배문호 베드로와 최천여 베드로 등 일곱 분이 공주와 청주에서 순교하였고, 1867년에는 배화첨 베드로 등 여덟 신자들이 서울과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성거산 출신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한 분들도 8위 이상이 된다. 이들 중 공주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유해가 성거산 줄무덤에 안장되어있다.

성거산성지사진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

신리성지


신리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815)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 사무실 : 041-363-1359
- F A X : 041-363-7200
홈페이지 http://www.sinri.or.kr 성지 미사 안내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찾아오시는 길 - 서울: 동서울터미널(하루 2번), 남부터미널(하루 6번) → 합덕 하차
- 다른 지방: 합덕 행 차편 이용
- 합덕터미널 - 택시(약 10분) 또는 버스(약 25분) - 신리 하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솔뫼성지, 합덕성당, 여사울성지

성지소개

신리성지사진

신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한 다블뤼 주교의 말처럼 신리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한 교우촌이다.

신리의 다섯 성인들을 기리는 기념 성당이 성지 중심에 있고, 그 안에 성인들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다. 2014년 5월 6일 이분들의 시성 30주년을 기리며 다블뤼 주교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의 사목활동과 교회서적 출판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에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신리성지사진

시설안내

:: 생가 - 주교관

신리성지사진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이곳에서 성 다블뤼 안 주교님께서 머무시면서 선교활동을 지휘하고,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기록했다.따라서 이 집은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며, 조선 제5대 교구청이기도 했다.
신리성지사진


:: 기념성당

신리성지사진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 외부 전경으로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건립하여 2006년 5월에 축성되었다.


:: 성당내부

신리성지사진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 내부로 대칭과 비율이 적절히 조화되어 밝고 편안한 느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 무명 순교자 묘지

신리성지사진
생가에서 약 2Km 북쪽에 위치한 공동묘지 내에 ‘무명순교자 묘지’가 안치되어 있다. 1차 32기, 2차 14기 총 46기의 줄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 거더리

신리성지사진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르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등 네 성인이 순교를 위해 스스로 붙잡히신 곳.

:: 순교미술관

신리성지사진

:: 성지 전경

신리성지사진

신리성지사진

성 손선지, 성 정문호 고향

부여지석리성지


지석리대표사진 관할 본당 홍산성당
(우33199)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산로 53-14
- 사무실 : 041-836-0067
- F A X : 041-836-1556
주소 (우33212)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368-1 찾아오시는 길

- 대전서부터미널에서 부여 방면 - 부여에서 홍산 - 홍산에서 충화 방면(하루 8번) - 지석리(팔충사 앞) 하차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여로 와서 위와 같이 이동

성지소개


부여지석리성지사진

지석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이다. 두 분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 성인은 열심한 신앙으로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병인박해 때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문호 성인은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는데 교우들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대성동 신리골에서 손선지 성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는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을 간직하며 칼을 받았다. 같은 날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한재권 요셉 성인과 함께 두 분의 무덤은 천호 성지에 있다.

지석리에는 손선지 성인의 종씨들이 비신자로 살고 있었다.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선조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성당에 밭을 기증했기에 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 성 손선지(베드로)
손선지는 성운 이라고도 하는데 1820년 아버지 손달원 (이냐시오)과 어머니 임 세실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세하여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다. 1837년, 불과 17세의 나이로 샤스땅 정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여 활동하였다. 김 루시아와 결혼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장남 손순화 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이주하여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담배농사를 주업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곳에서도 전교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집은 공소로 사용되었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전주 감영에서 나온 포교들에게 잡혔다. 포교는 손선지를 "사학의 괴수" 라 하여 앞세워 끌고 갔다. 향리 오사현이 찾아와 "천주교을 믿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포교와 의논하여 빼내 주겠다" 고 했으나, 그는 "나는 이미 죽기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소. 당신이 그런 유혹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일이오"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포교들은 손선지를 심문하여 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했지만 , 팔이 부러지고 만신창이 가 도어서도 그리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니문하는 영장에게 자신은 생명을 바쳐 천주를 믿을 것임을 단호히 밝혔다. 내일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손선지는 함께 갇혀 있던 김사집에게 옷을 벗어 주면서 "나는 내일 죽을 몸이니 이 옷은 쓸모없다" 며 입으라 하였다.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될 때가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 예수 마리아" 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일명 기식이라고도 하며 1801년 충남 임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 하였고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였다.
그는성품이 온화하고 예의가 바르면 행동이 모범적인 인격자였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식이 많고 신앙심이 깊어 외교인과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수계 생활을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년 가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의 손길이 그가 살던 신리골에도 뻗쳐오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5일 저녁,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신리골에 담배를 사러 상인들이 출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주 진영의 포교들이 담배상인으로 가장하고 정문호의 지베 들이 닥쳤다. 그리고 " 천주교를 믿는다" 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같은 마을에 살던 손선지, 한재권과 함께 전주 진영으로 압송하여 진영 앞 구류간에 수감했다.
이곳에는 앞서 잡혀온 조화서, 조윤호 부자와 이명서, 정원지 등의신자들도 있었다. 노구의 정문호는 3차에 걸쳐 심문을 받는 동안,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치명하자는 조화서의 권고와 격려를 받고 마음을 바로 잡아 치명키로 결심했다.그래서 영자에게 '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고 서슴없이 말했고 열심히 기도를 바치면서 마음의 평온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
12월 13일, 그는 감옥을 나와 형장으로 가면서도 기쁜 얼굴로 열심히 기도 드렸다. 그리고 함께 형장을 가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오늘 천당 과거시험을 보러가고 있으니 오늘이야 말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오" 하였고 일행들도 그의 말에 동의 하였다. 정문호는 자기 차례가 되어 휘광이가 칼을 내리쳤지만 칼이 빗나가자 고개를 들고 휘광이를 바라보며 "어찌 하여 단칼에 목을 치지 못하느냐?" 하고 호령했다. 세번째 칼에 목이 잘렸는데 그이 목에서 흰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나이 65세 였다.

내포지역 선교의 중심지

합덕성당


합덕성당사진 주소 (우31812)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 사무실 : 041-363-1061
미사 안내 순례자 미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피정, 식사, 숙박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서울: 동서울터미널(하루 2번), 남부터미널(하루 6번) → 합덕 하차
- 다른 지방: 합덕 행 차편 이용
- 합덕터미널에서 걸어서 30분, 택시 이용 시 3분 거리(2km)

성지소개

합덕성당사진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되었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 1929년 페랭 신부에 의해 지어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충남도 기념물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관내에는 복자 원시장·시보 형제의 우물, 복자 김사집의 비방구지 마을, 양촌공소, 세거리, 상리, 하흑공소 등 유서 깊은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성당에서는 ‘성가정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단체 피정, 연수, 신앙학교는 물론 고풍스런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 교우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합덕은 조선시기 순교자 외에도 6.25순교자 페랭 신부가 시복 대상에 올라 있다. 아울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직자·수도자를 배출하여 교회발전에 이바지 해왔다.

합덕성당사진

합덕성당사진

합덕성당사진


합덕성당사진

:: 원시장 원시보 우물터

합덕성당사진

박해중에도 신앙을 꽃피운

황무실성지


황무실성지 대표사진 관할 본당 신합덕성당
(우31812) 충남 당진시 합덕읍 굴미2길 40
- 사무실 : 041-362-5947
- F A X : 041-363-5947
주소 충남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찾아오시는 길

- 서울: 동서울터미널(하루 2번), 남부터미널(하루 6번) → 합덕 하차
- 다른 지방: 합덕 행 차편 이용
- 합덕터미널에서 택시 이용 시 10분 거리(5.2km)

성지소개


황무실성지

황무실은 오래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내포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초기인 1785년경부터 신자들이 거주하였다. 초기 신자로 알려진 유군명(시메온)은 입교한 후 종들을 해방시켜주어 일찍부터 하느님 안에서 평등을 실현한 분이었다.

100여명의 신자가 거주했던 황무실 교우촌은 박해 중에 숨어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식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도입된 영해회(일명 성영회) 사업이 일찍부터 시작되어 고아들을 입양하여 가족으로 삼았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중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랑드르(Landre) 신부가 각각 1857년과 1863년에 병으로 선종하여 묻혔다.

황무실의 첫 순교자로 기록된 이보현(프란치스코)은 1800년 1월 9일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홍주, 해미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황무실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로 붕괴되어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곳에 있던 메스트르, 랑드르 신부의 묘는 1970년 합덕 성당으로 이장되었고, 2003년 다시 한 번 대전교구 성직자 묘지(대전가톨릭대학교 구내)로 이장되었다.

순교로 지켜온 120년의 믿음 터

공세리성지·성당


공세리성지성당대표사진 주소 (우31427)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 사무실 041-533-8181
- F A X 041-533-2087
홈페이지 http://www.gongseri.or.kr 이메일 E-Mail : psg748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30분
평일: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피정 및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박물관 이용: 오전 10시-오후 4시(매주 월요일 휴무)
찾아오시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송악IC에서 20분 소요 - 경부고속도로: 안성IC에서 30분 소요
- 온양온천역(장항선·지하철) 또는 아산시외버스터미널 하차 → 시내버스(40분 소요) 인주파출소 하차 또는 택시 이용(20분 소요)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성지

성지소개

1890년 설립된 공세리성당은 합덕성당과 더불어 충청도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본당으로, 조선시대에 순교한 32위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공세리성당 주변은 조선시대 충청도 내포지방의 바닷가 입구로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였다. ‘공세리’라는 지명은 내포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에서 유래하였다. 공세리성당의 첫 터전은 예산 간양골에 있었으나 폐지된 공세창을 매입하여 189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공세리성지성당사진

지금의 성당 건물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가 설계하여 1922년에 완공하였다. 근대 고딕식 벽돌 건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144호로 등록되어 있다. 성지 내에는 순교자들의 납골식 묘와 현양탑이 있고, 옛 사제관을 개조하여 만든 박물관에는 박씨 삼형제의 유해와 박해시대 교우촌의 생활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공세리성당은 300여년이 넘는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경관을 통해서도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으며,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아름다운 성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 피정 프로그램
- 성월(성모성월, 예수성심성월, 순교자성월, 묵주기도성월, 위령성월)에 따른 피정
- 전례시기(대림, 성탄, 사순, 부활)에 따른 시기별 전례프로그램
- 순교 교육 프로그램
- 단체의 성격에 따른 차별화된 프로그램(주일학교, 청년회, 구역·반장, 꾸리아, 사목회, 노인대학)
- 성경을 통한 피정 프로그램
- 영상을 통한 피정 프로그램
- 거룩한 독서에 의한 성경읽기 프로그램
- 떼제와 함께 하는 참회예절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신자들에게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교육의 장(場)으 로 제공 되고 있다.

공세리성지성당사진


공세리성지성당사진

한국의 베들레헴

솔뫼성지


솔뫼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754)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 사무실 : 041-362-5021~2
- F A X : 041-362-5524
홈페이지 http://www.solmoe.or.kr 이메일 E-Mail : solmoe182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7시, 11시
평일: 오전 7시, 11시
1,000명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서울: 동서울터미널(하루 2번), 남부터미널(하루 6번) → 합덕 하차
- 다른 지방: 합덕 행 차편 이용
-합덕터미널에서 걸어서 20분, 택시 이용 시 3분 거리(1.5km)

성지소개

솔뫼 성지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의 ‘솔뫼’는 1836년 김대건 신부의 신학생 추천서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름이다. 김대건은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를 한 후 1845년 24세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솔뫼에는 기와집 생가(대건당)가 복원되어 있고, 소나무 숲 한 가운데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솔뫼성지사진

김대건 신부의 신앙은 솔뫼에서 대를 이어 살던 선조들의 모범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는 솔뫼에서 신앙을 받아들여 살다가 1814년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1839년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 역시 1846년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14년 8월 아시아의 청년들이 솔뫼에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의 서막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였다. 교황의 방안을 기리며 ‘매듭을 푸는 성모 경당’과 몇몇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솔뫼 성지는 2014년 9월 국가지정문화재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원머리(한정리) 순교자 묘 성지

신평원머리성지


신평원머리성지대표사진 관할 본당 신평성당
{31741)충남 당진시 신평면 신평길 63
- 사무실 : 041-363-6761
- F A X : 041-363-6764
주소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
성지 미사 안내 순례자 미사·식사: 신평 성당(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서울(남부터미널): 당진행 승차 - 신평 정류장 하차 - 천안(버스터미널): 당진행 승차 - 신평 정류장 하차

성지소개

원머리는 이존창 성인이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1785년부터 조선 교회의 시작과 함께 교우촌이 형성된 아주 오래된 곳이다. ‘원머리’는 바닷가 갯벌을 논으로 개간하여 사용하기 위해 둑을 쌓은 ‘언(堰)의 첫 머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신자들은 염전, 어업, 농업에 종사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대박해 시기에 20명의 신자들이 홍주와 해미,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원머리 성지에는 현재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의 묘가 마을 한복판에 모셔져 있다.

순교자 묘 인근에는 원머리 공소의 강당이 보존되어 있으며, 원머리와 역사를 같이 하는 새터 공소와 음섬 공소의 강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과 순교자들의 묘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신앙공동체가 지금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실체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현재 원머리성지에서는 박해순교자 20명과 근.현대 순교자 2명을 포함하여 22명의 순교자를 모시고 시복과 시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 2000년 4월 4일 성전 신축 당시 순교자 묘역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이장 후 현재의 원머리 순교자 묘역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박선진(말구), 박태진(마디아) 의 묘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한정 공소 모습
신평원머리성지사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신앙을 증거한 자리

진산성지


진산성지대표사진 주소 (32700)충남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 사무실 : 041-752-6249
- F A X : 041-752-6247
홈페이지 http://jinsan.djcatholic.or.kr/ 이메일 E-Mail : ij2066@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0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대전서부터미널에서 진산 행 버스 - 신대리 하차 - 지방리 행 시내버스
- 금산에서 진산·지방리 행 시내버스

성지소개

진산성지대표사진

진산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으로 인해 박해가 일어났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에게 질문이 던져지자, 그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이 되어 참수로 치명한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거행된 124위 시복식에서 윤지충은 대표 순교자가 되었으며, 권상연 역시 복자품에 올랐다. 두 분 복자 외에도 진산 성지는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김영오 아오스딩, 김영삼, 김요한 세 분의 순교자들도 함께 기리고 있다. 진산성지 성당은 2017년 5월 29일부로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682호)로 등록 되었다.

진산성지대표사진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진산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이다.
윤지충은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스스로 교회서적을 읽고, 3년 동안 교리를 받은 후에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연 야고보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 사촌 동생인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이후 권상연은 다른 학문을 접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복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의 초상화는 헌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 저작권 승인을 얻어 게재함.

무명 순교자 생 매장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957)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 사무실 : 041-688-3183
- F A X : 041-688-9039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이메일 E-Mail : mbh7799@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숙박 가능: 청소년 회관(40명, 10인실 4개), 팬션 1동(6명) - 사전 예약
찾아오시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 - 우회전 - 첫 번째 신호등 좌회전 - 1.5km 전방 위치
- 대전·당진고속도로: 예산 수덕사IC - 45번 국도 - 덕산 - 해미

성지소개


해미성지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이다.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지만 대부분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해미 순교자들 중에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해미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이유는 이곳이 서해안 방어를 위해 마련한 해미읍성과 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죄인들의 처형이 군인들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므로 충청도 서북부 내포지방에서 잡힌 신자들 중 일부는 홍주와 공주로, 일부는 해미로 보내졌다.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한 번 알아 모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다하여 순교에 이르렀다.

해미성지

해미에는 조선시대에 건축된 읍성과 관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체포된 신자들은 1차로 해미읍성 안에 있는 관아에서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기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신자들을 매달아 형벌을 가하던 회화나무(호야나무)가 있고, 감옥도 복원되어 있다. 신자들을 처형할 때에는 읍성의 서문 밖으로 이송하였으므로 그 방향으로 설치된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가면 순교 성지에 이른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지를 방문하였고, 해미읍성에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해미성지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

황새바위순교성지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541) 충남 공주시 왕릉로 118
- 사무실 : 041-854-6321~2
- F A X : 041-854-6323
홈페이지 http://www.hwangsae.or.kr 이메일 E-Mail : hsbw1@naver.com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오전 9시 30분)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 공주 신터미널-터미널 옆 버스정류장 125번, 101번 버스 이용 공주중학교 하차
- 서울 남부터미널 - 공주 구터미널 - 도보 10분(125번, 101번 버스 이용 가능)
- 내비게이션으로 ‘공주시 교동 1-41번지’ 검색 → 성지 입구 주차장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공주지역 순교터 6곳
황새바위성지> 충청감영터(포정사)> 향옥터(교동성당)> 진영터> 중동성당> 장깃대나루

성지소개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순교탑 무덤 경당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형구돌

공주에 있는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조선 천주교회 박해 역사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로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가 337위에 이르고, 무명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주는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던 중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청도 전역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배교하지 않으면 공주로 압송되어 최종 문초 고문 판결 처형되었고, 다른 지역의 신자들도 공주로 보내 최종 형을 집행 하였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기려야 할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향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있고, 신유박해 때 참수 치명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순교자가 있다. 또한 124위 복자 이국승 바오로, 김원중 스테파노, 청양 정산에서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가 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충청남도 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지 안에 성당과 성체조배실이 있고, 언덕을 오르면 십자가의 길, 성모동산, 순교탑, 무덤경당, 부활경당,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또한 맞은편에는 둘러서서 순교자들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공산성이 있는데, 백제 왕도의 성곽인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황새바위성지


황새바위성지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사진 관할 본당 삽교 성당
(우:340-905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신가꽃산길 111
- 사무실 : 041-338-1924
- F A X : 041-338-1923
주소 우:32412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270-23
성지 미사 안내 미사·식사 불가 찾아오시는 길

- 기차: 장항선 삽교역에서 하차
- 버스: 남부터미널에서 예산행 시외버스. 예산에서 내려 삽교행 시내버스

성지소개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불렸다.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에 물이 차서 섬이 되어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816년 봄 경상도에서 발생한 박해의 영향이 배나드리에도 미쳤다.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 경상도에 피신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7년 10월 배나드리에서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순교하였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이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삽교읍 용동리)에서 태어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여 살다가 1797년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청주를 거쳐 해미로 이송되어 1800년 1월 9일 63세로 순교하였다. 그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배나드리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발상지

수리치골성모성지


수리치골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524 충남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 피정의 집 : 041-841-1750
- F A X : 041-841-7980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사전 예약시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유구시외버스터미널: 상갑리행 버스를 타고 수녀원(수리치골)에서 내림
- 대전·당진 고속도로: 마곡사 IC에서 유구 쪽으로 직진 - 산정교차로에서 청양(부여) 방면으로 좌회전 - 청홍삼거리에서 봉갑리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직진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황새바위순교성지, 청양다락골성지

성지소개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으로 ‘성모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조직된 뜻 깊은 장소이다.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이 시작된 곳이며, 공주 지방의 신앙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중국 상해에서 첫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0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1846년 뜻밖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수리치골로 피신하였다. 그해 11월 2일 두 선교사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조선 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였다.

성모성심회는 수리치골의 한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로 시작한 작은 단체였다. 하지만 그 회의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편지를 보내 이 단체를 명부에 올려달라고 청하여 서로 연대하였다. 신자들은 주일마다 수리치골에 모여 전 세계 회원들과 뜻을 모아 조선 교회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성모성심회의 뜻을 계승하는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의 총원이 자리하고 있다.

수리치골성지사진

수리치골성지사진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 터

여사울성지


여사울성지성당대표사진 주소 (우32417)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 사무실 : 041-332-7860
- F A X : 041-335-0641
이메일 E-Mail : csy3212@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화요일: 오후 7시(하절기 오후 7시 30분), 수-토: 오전 11시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기차(장항선): 용산 - 천안 - 신례원역 하차. 택시나 버스 이용
- 시외버스: 천안 - 신례원 - 합덕 방향 - 신종리(여사울성지)

성지소개

:: 여사울 성지-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충청남도지정 기념물 177호)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여사울은 충청도의 첫 천주교 신자인 이존창 루도비코의 고향이다. 그는 1784년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내포(內浦)라 불리는 충청도 서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으므로 그를 ‘내포의 사도’라 부른다. 그의 뛰어난 학덕과 영향력,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사울과 인근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전해졌다.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여사울을 중심으로 내포지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이곳을 ‘신앙의 못자리’라고도 부른다. 여사울은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을 배출한 곳이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김광옥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이다. “충직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한 김광옥의 말처럼 여사울은 조선 후기 박해시대 내내 올곧게 꿋꿋한 신앙을 간직해온 마을이다.

여사울에는 첫 신자 이존창을 기리는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있고, 인근에 옛 공소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마을 안쪽과 언덕에 조그맣게 자리한 두 건물은 내포지방의 중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던 신앙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또한 병인박해 후 10여년을 제외하고는 한국 교회가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앙공동체가 계속유지 되어온 살아 있는 신앙 터전이다.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최양업 신부 탄생지 / 무명 순교자 줄무덤

청양다락골성지


청양다락골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3312)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 사무실 : 041-943-8123
- F A X : 041-943-8124
홈페이지 http://www.daracgol.or.kr 이메일 E-Mail : msch65@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30분
평일: 오전 11시 30분(월요일 미사 없음)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서울에서 올 때 광천 IC / 목포ㆍ전주에서 올 때 대천 IC로 나와 공주·청양 방면으로
- 경부고속도로:
서울에서 올 때 대전·당진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공주 IC로 나와 청양 방면으로 부산·대구에서 올 때 대전·당진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공주 IC로 나와 청양 방면으로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홍주성지에서 다락골성지, 혹은 다락골성지에서 갈매못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그러나 두 코스가 기본 30Km를 넘는 거리이기에 하루 코스는 불가능하다.
다만 화성면 읍내 버스 주차장에서 최양업 신부님 생가터를 거쳐 줄무덤성지까지 4Km 구간은 가능하다.

성지소개

청양다락골성지사진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는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산골 마을 청양 다락골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할아버지 최인주가 모친 경성이씨를 모시고 피난해 오면서 교우촌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탄생했으며,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곳이다.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의 굳건한 신심과 불같은 열심, 그리고 훌륭한 분별력은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었다. 최경환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이성례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서, 시복 대상자가 되어 복자품을 앞두고 있다.

또한 다락골은 1839년 기해박해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서울에서 먼저 체포된 앵베르 주교가 교우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다락골에 피난해 있던 두 선교사에게 자수하도록 편지를 보냈다. 이에 두 선교사는 순명하여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성지 내에 있는 줄무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현 홍성)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무덤이다. 세 지역의 줄무덤으로 되어 있는데, 총 37기(본래 40기)로 모두 무명 순교자·증거자들이다.

청양다락골성지사진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신앙을 증거한 80년간의 순교터

홍주순교성지


홍주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223)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 사무실 : 041-633-2402
- F A X : 041-634-3217
홈페이지 http://www.hongjushrine.com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은 예약 시 가능)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기차(장항선): 용산역·익산역 승차 - 홍성역 하차
- 버스: 홍성 터미널에서 하차
- 홍성역, 터미널에서 성지성당까지 도보 30분, 택시 5분, 버스 20분 소요

성지소개

홍주성지대표사진

홍주성지는 충청도의 첫 순교터이며,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다.

홍주성지대표사진

홍주는 1784년 한국천주교 창설초기부터 충청도의 첫 신자인 이존창의 영향으로 복음이 활발히 전파된 곳이다.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았던 홍주지역(내포지역)은 행정, 군사의 요충지인 홍주목과 진영이 있던 관계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기록상으로만 초기 박해(신해~정사)동안 8명, 이어 중기 박해(신유~기해)동안 4명, 병인박해에 200명이나 된다(총212명). 박해기간(1791~1869) 동안 무명 순교자까지 1,000명이 넘는 순교자를 탄생시킨 거룩한 성지이다.

특히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홍주 옥에서 세례를 받고 추운 날 동사형으로 순교하여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센시오, 황일광 시몬이 복자품에 올랐다.

많은 순교자가 있던 관계로 홍주성지에는 6곳의 순교터가 있다. 고문과 재판으로 피로 얼룩진 목사의 동헌과 진영장의 동헌, 그리고 감옥터, 조리돌림을 당한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14처)가 있다.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1.5km 거리의 십자가의 길과 순교의 길을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특별히 성지는 열차 순례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내포 순례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홍주성지대표사진

홍주성지대표사진


::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 터 3곳
- 홍주 옥(1871년 홍주목지도, 구 검찰지청 및 법원지원자리) : 113명(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이 순교한 최대의 순교 터이다.
- 생매장 터: 홍주성 밖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에 생매장터가 있다.
- 참수 터: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m지점


::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 한 장소 3곳
- 경사당 자리: 순교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당하던 홍주진영의 동헌(현. 한국통신 자리)
- 근민당 자리 : 홍주 목사의 동헌(현. 군청 뒤뜰)
- 저자거리 : 순교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던 장소(구. 예비군중대 터)


:: 성지 순례 코스
①근민당-> ②홍주 옥->③ 경사당-> ④저자거리-> ⑤참수 터->⑥생매장 터-> ⑦홍성 본당(미사 요청 시)

홍주성지대표사진 홍주성지대표사진

산막골·작은재줄무덤성지


작은재줄무덤사진 관할 본당 서천본당
(우33616)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안길 31-13
- 사무실 : 041-951-9014
- F A X : 041-951-9114
주소 작은재성지 : 충남 서천군 문산면 판문로624번길 153
산막골성지 :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81번길 119
성지 미사 안내 미사·식사 불가 찾아오시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IC - 판교·부여 방면 우회전 - 국도 5.1km 지점에서 금복리 방향 우회전 - 지방도 0.7km 지점에서 천방농원 입구(앞) 하차 - 대형버스는 입구 도로변에 주차-임도 1.1km 지점에 산막골 교우촌 표지석 광장(목적지)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 서천 산막골·작은재 교우촌 사적지 순례길 안내(총 5.5km)
독뫼 공소(수암리 296-4) - 오르막길 임도 0.9km - 작은재 줄무덤 터 - 내리막길 임도 1km - 작은재 공소 터 입구 표지석 - 평야길 농로 2.4km - 천방농원 입구 - 오르막길 임도 1.2km - 산막골 교우촌

성지소개

천방산 자락의 산막골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들 중 하나이다. 1839년 기해박해 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서천지역 순교자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들은 57명에 이른다. 여러 교우촌 중 산막골이 가장 컸다.

산막골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페롱(Ferron) 신부가 1858년부터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곳이다. 그는 1850년 프랑스 세즈에서 서품을 받고, 1856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가 1858년~1865년까지 보낸 서한들 가운데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6통 남아있고, 조안노 신부가 1862년 11월 4일에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1통 전해진다.

또한 산막골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하여 병인박해 전까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이다. 이와 함께 천방산 기슭 광장(고갯마루,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9-1)에 신앙 선조들의 유해가 묻힌 줄무덤 터가 있다. 이곳은 독뫼 공소 터와 판교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묻힌 신앙 선조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2017년 5월 현재 산막골에서 작은재로 이어지는 옛길 3.5km를 복원하는 중이다. 멀리 서해바다가 보이는 이 길은 옛 공소 신자들이 애환을 함께 하며 넘나들던 곳이다.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대흥봉수산순교성지


대흥봉수산순교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450)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
- 사무실 : 041-333-0202
- F A X : 041-333-0987
홈페이지 http://cafe.daum.net/bongsusan1801 이메일 E-Mail : bongsusan180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주일: 오전 11시
평일: 오전 11시(월요일 7시)
피정·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기차(장항선): 삽교역 혹은 예산역 하차. 택시나 시내버스 이용
- 버스: 예산 또는 내포시 터미널 하차. 택시나 시내버스 이용
- 고속도로: 당진·대전고속도로 - 예산수덕사IC 이용

성지소개

대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마을이다. 대흥 봉수산 성지와 연고가 있는 순교자는 복자 김정득 외에 황 베드로, 백청여, 원지우 안드레아, 이 루도비꼬, 이 아우구스띠노 등이 있다.

복자 김정득은 예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두 순교자는 고향이 서로 달랐으나 공주 무성산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었다. 그들은 예산, 홍주, 청주를 거쳐 한양까지 이송되며 여러 차례 형벌을 받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고향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지시에 따라 1801년 8월 두 순교자는 예산까지 함께 내려왔으나 김정득은 대흥으로 보내졌다. 헤어질 때 둘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는 작별 인사를 했고, 약속대로 8월 25일 같은 날 순교하였다.

봉수산 정상에는 백제부흥운동이 있었고,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최후 결전한 ‘임존성’이 있으며, 그 아래로 예당호가 보이는 휴양림이 있다. 성지 곁에 ‘대흥관아’가 있고, 그 안에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다. 임성아문(任城衙門) 앞에는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를 기리는 ‘의좋은 형제 효제비’가 있다. 성지 옆에 ‘의좋은 형제공원’과 인접하여 ‘대흥옥’, ‘조리돌림 하던 저잣거리’, ‘순교한 참수터’ 등을 재현한 순교자 공원이 있다.


■ 대흥봉수산 성지 순례지

○대흥동헌 : 교우들이 심문과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하던 장소. 동헌 뒤뜰에 척화비가 있음.
대흥봉수산성지

○대흥 옥터 : 교우들이 가두고 배교나 순교를 선택할 기회를 주던 형옥터. 현재 대흥농협 창고터임.
대흥봉수산성지

○대흥 참수터 : 청양다락골에서 여사울을 향해 흐르는 무한천을 대흥 아사(衙舍) 앞에서는 내천(奈川)이라 불렀음. 예당호에 수몰된 내천변(奈川邊)이 조선시대 처형지였음.
대흥봉수산성지

도앙골성지


도앙골성지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193)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삽티성지→도앙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삽티→도앙골 3.5㎞)

성지 소개

도앙골은 1800년대 초부터 공주, 서천 등지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살던 교우촌이다. 1890년의 교세통계표에 50명이 넘는 교우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나온다. ‘도앙골’은 이 마을 계곡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하여 생긴 도원곡(桃園谷)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도앙골 출신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시몬, 오 요한 등이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신부가 국내로 입국하여 1850년 10월에 쓴 첫 편지의 발신지가 ‘도앙골’이다. 오랜 기간 동안 한 곳에 머물며 조선 천주교의 사정을 자세히 기록한 편지인데 이곳 도앙골에서 작성되었다. 이에 따라 도앙골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기원하는 현양비가 세워져있고, 사제로서 그의 열정적인 사목을 기념하는 제대를 만들어 봉헌하였다.

도앙골 교우촌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삽티 교우촌’(부여군 홍산면 상천리)과 관련을 맺고 있다. 도앙골 교우들이 삽티 교우들과 서로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도앙골과 삽티를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도앙골성지대표사진
도앙골성지대표사진

서짓골성지


서짓골성지대표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514)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8-3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주일 오후 2시
※ 평일에는 순례자들 사전 연락에 따라 봉헌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완장포구→서짓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완장포구→서짓골 9.5㎞)

성지소개

서짓골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들이 16년간 안장되었던 곳이다. 그해 3월 30일 성 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분들 중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네 분의 시신이 따로 수습되어 서짓골로 옮겨졌다. 혹독한 박해 중에도 20여명 교우들이 바닷길과 산길을 이용하여 큰 위험을 감수하며 서짓골로 옮겨 모셨다.

1866년 당시 서짓골은 작은 교우촌이었는데 한 교우의 담배밭에 네 순교자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인 1882년 이 유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박해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데다가 사회가 혼란하여 유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894년 네 분의 유해는 다시 국내로 옮겨져 지금은 명동 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네 분의 순교자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聖人)들이 되었다.

산골 교우촌이었던 서짓골은 1990년대 들어 보령댐이 건설됨에 따라 지금은 댐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댐의 물은 충청남도의 서부지역, 옛 프랑스 선교사들이 ‘내포지방’이라 부르는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서짓골에 묻혀 있던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열정적 신앙이 지금은 영적 샘물이 되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서짓골성지대표사진
서짓골성지대표사진

삽티성지


삽티성지대표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202)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주일 오전 11시
※ 평일에는 순례자들 사전 연락에 따라 봉헌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삽티성지→도앙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삽티→도앙골 3.5㎞)

성지소개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살던 교우로 잘 알려진 이는 황석두(루카) 성인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이다. 황석두 성인이 이들을 삽티에 살게 하여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성인이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자 얼마 후 황천일과 황기원이 시신을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황석두 성인의 무덤은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나 삽티의 ‘즘터’(옹기 터)에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즘터에서는 1964년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중에 박해시대의 성물이 담긴 옹기가 발견된 바 있다.

삽티 교우촌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교우촌’(부여군 내산면 금지리)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삽티 교우들은 최양업 신부의 거처가 있던 도앙골 교우들과 서로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삽티와 도앙골을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삽ㅌ성지대표사진

남방제성지


남방제성지대표사진 관리 본당 온양신정동성당
충청남도 아산시 곡교천로27번길 25-10
- 사무실 : 041-534-2324
- F A X : 041-543-2324
주소 (우31530)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서부북로 763-42(신창면 남성리 412-3) 홈페이지 http://cafe.daum.net/nambangjaeshrine 성지 미사 안내 온양 신정동 성당(사전 예약 필요) 찾아오시는 길 - 전철·기차 이용시: 온양온천역 하차 - 역앞 버스정류장에서 신창면방향버스 - 남성리 하차
- 버스 이용시: 아산 터미널 하차 - 터미널 옆 버스정류장에서 신창면 방향버스 - 남성리 하차

성지소개

남방제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난 곳이고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여러 순교자들이 사셨던 곳이다.

남방제성지대표사진

조윤호의 가문은 구교우 집안으로 본래 경기도 수원 도마지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하고, 할머니 권 율리아나가 선종하자 아버지 조화서는 남방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48년 조윤호를 낳았다. 조화서는 1850년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서 전국 각처에 숨어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는 길에 함께 하였다.

조윤호는 1865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듬해 이 루시아와 혼인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866년 12월 5일 밤 포졸들이 급습하여 조윤호와 아버지 조화서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국법에 따라 부자를 같은 날 처형하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조화서는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아들 조윤호는 12월 23일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일은 달랐지만 조화서, 조윤호 부자는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같은 날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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