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으로 택한 곳이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갈매못순교성지


갈매못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3406)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사무실 : 041-932-1311
- F A X : 041-932-1218
홈페이지 http://www.galmaemot.kr/ 이메일 E-Mail : ssss6693@naver.com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30분, 주일 오전 8시 본당 미사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이용
기차는 대천역에서 버스는 보령터미널에서 하차하시어 보령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시고 명문당사거리에서 ‘오천 영보리행’ 버스(소요시간 약 1시간)를 이용하시거나 대천역이나 보령터미널에서 택시(소요시간 약 20~30분)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 자가용 이용
서해안 고속도로 광천IC에서 우회전하여 300m → 천북, 오천 방향으로 10Km → 오천 방향(보령 방조제 경유) 5Km 정도 오시면 됩니다.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갈매못순교성지 → 다락골성지 ( 약 27Km - 소요시간 7시간 )
(갈매못순교성지 → 오천항 → 청소 → 오서산 → 다락골성지)

성지소개

갈매못순교성지는 조선시대 박해 중 가장 큰 박해였던 병인박해(1866년)때에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성 장주기 요셉, 성 황석두 루카와 다섯 명의 유명 순교자(박 베드로, 손치양 사도요한, 이영중, 이 발토로메오, 임운필)와 수많은(약 500여명) 무명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려다 무참히 처형당한 순교터로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곳이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은 더 이상 많은 신자들의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사목활동중인 다른 신부들에게 자수를 권고하는 편지 보낸 뒤 체포된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의 편지를 받고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가 자진해서 주교님이 계신 곳에 가서 자수하여 세분은 서울로 압송된다. 이 때 성 황석두 루카는 성 다블뤼 주교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압송되는 주교님 일행을 뒤따라가 주교님께 울면서 간청을 드려 함께 압송되었다.

서울에서 삼일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서 ‘군문효수형’이라는 형벌을 받고 이 곳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처형 당하게 되는데, 이때 이미 포도청에 잡혀 있던 성 장주기 요셉이 자진해서 주교님 일행과 함께 처형당하길 원하여 다섯분이 육일동안 오천으로 끌려 내려오시어, 1866년 3월 29일 충청수영성에 도착하신 후 그 다음날인 3월 30일(성 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처형을 당하신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은 세 번 칼질로, 성 오메트로 오 베드로 신부님은 두 번, 성 위앵 민 마르티노 신부님,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은 한 번에 칼질에 의해 목이 떨어져 나간다. 떨어져 나간 다섯분의 목을 장깃대에 걸어서 삼일 동안 전시한 후 떨어진 목과 몸을 단순히 칡넝쿨로 묶어서 인근 모래밭(현 갈매못순교성지 주차장)에 묻는다.

그 후 성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를 거쳐 현재 연풍에 모셔졌으며, 나머지 네분의 유해는 서짓골(현 보령호 부근)에 약 17년간 모셨다가 살은 다 진토화 되고, 유해만 일본 나가사키로, 다시 명동성당을 거쳐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대성전 지하에 모셔져 있다.

갈매못 순교성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섯 성인분들과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신앙 증거의 자리이다.

갈매못이라 어원은 성지가 속한 뒤 산의 모양새가 예로부터 ‘목이 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을 닮았다’해서 ‘갈마음수형’,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제는 목이 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지치고 힘든 우리의 교우들이 주님안에서 위로받고, 치유받는 생명의 땅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4. 14)”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들

聖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사진
聖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1818-1866)

프랑스 아미엥 출신. 1841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후 1845년에 페레올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그 후 21년 동안 모진 박해를 감내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었다. 1857년에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그의 '조선순교자비망록'은 훗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聖 위앵 민 루카 신부사진
聖 위앵 민 루카 신부 (1836-1866)

프랑스 귀용벨 출신. 1861년 사제로 서품된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864년에 입국하여, 다블뤼주교에 배속되어 조선말을 배운 뒤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사목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그의 짧은 사목활동도 끝을 맞이한다. "나는 젊어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나 저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못하고 죽는 것이 괴롭다". 30세의 나이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聖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사진
聖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1837-1866)

프랑스 에제크 출신. 1862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1863년에 조선으로 입국. 경기도 수원 샘골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교구 4대교구장인 장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자 계승권 주교인 다블뤼주교가 있는 충청도 합덕신리로 내려왔다.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자수하여, 다블뤼, 위앵,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聖 황석두 루카 회장사진
聖 황석두 루카 회장 (1812-1866)

충북 연풍 출신의 양반. 20세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한 천주교 선비를 만나 입교한다. 선교사들의 한문선생으로, 공동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오랫동안 다블뤼 주교님을 보필하였고 그의 저술과 번역을 도왔다 '성찰기략','신명초행','회죄직지'등은 황석두 성인의 문장으로 번역된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나도 함께 천주님을 증거하겠다"고 말하며 따라 나섰다. 성인의 원대로 다블뤼주교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聖 장주기 요셉 회장사진
聖 장주기 요셉 회장 (1802-1866)

경기도 수원의 양간 출신. 현 수원교구 요당리 성지. 1826년 영세.입교. 모방신부에 의해 전교회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신앙심과 풍부한 교리지식을 갖고 있었다. 1845년 충청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 들어 공동체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최초의 신학교인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으로서 신부님과 학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체포되었다. 1866년 3월 30일에 갈매못에서 62세로 순교하였다.

그 외 순교자들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청 신창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 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 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24세 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필립보이다.
(증언록 120번 224쪽, 치명일기 727번, 수영)

손치양 사도요한

손치양 사도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홍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라.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6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이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 가 효수하니 나이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2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임운필

임운필은 임토마스 (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이 많은 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 뜻대로 하라” 한 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더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성거산성지


성거산순교자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058)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 사무실 : 041-584-7199
- F A X : 041-584-7189
홈페이지 http://sgms.zerois.net 이메일 ccjp-sgms@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 천안IC에서 오시는 길

천안IC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우회전(입장방향)→단국대병원을 지나 계속 직진→성거를 지나 →입장삼거리에서 위례교차로 우회전(성지입구 표지판)→7Km 직진 →성거산성지도착

◈ 서울방향(남안성IC)에서 오시는 길

경부고속도로→음성평택간 고속도로 음성방향 진입→남안성IC에서 나온 후 우회전(입장방향)→상장교차로→위례교차로(성지입구 표지판) 좌회전→7Km 직진 →성거산성지도착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성거산성지 - 배티성지 (등산로)

성지소개

성거산성지사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 46-1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순교 성지는 두 곳의 묘소와 소학골 교유촌 유적지가 있다.경기, 충북, 충남 삼도 접도구역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도 보기 드문 해발 579m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연(天然)성지이다. 특히 봄,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장관을 이루어 찾아온 순례객들이 감탄을 한다.

성거산성지와 주변은 신유박해 전후로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유서 깊은 7개의 교우촌과 박해가 끝난 후에도 1921년대 까지 교우촌들이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박해시기인 1851~1866년까지 7개 교우촌중 소학골 교우촌은 한국인 사제 최양업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신부, 메스트로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니콜라 칼래 신부님들의 사목활동 중심지 였다. 또한 서덜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큰 아버지인 최영렬씨와 세째 동생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잠시 성장하였단 곳이기도 하다.

목천 순교사를 보면 성거산 기슭 주위에 산재된 교우촌에서 23명이나 순교자들이 나왔으며, 현재 병인년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한 배문호 베드로와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은 제1줄무덤에 묻혀 있다. 이 외에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이 곳 성지에 이장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은 그 오랫동안 방문하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성거산성지사진


병인박해기와 무인년의 목천출신 순교자 23명(교회순교록)

성 명(세례명) 거주지 순교일 (나이) 순교지(형식)
배문호 베드로 목천 소학골 1866. 11. 8 (24세) 공주(교수)
최천여 베드로 목천 소학골 1866. 11. 8 (45세) 공주(교수)
최종여 라자로 목천 소학골 1866. 11. 8 (42세) 공주(교수)
고 요셉 목천 소학골 1866. 11. 8 공주(교수)
채 서방 며느리 목천 소학골 1866. 11. 8 공주(교수)
서완순 스테파노 목천 장자동 1866. (44세) 공주(교수)
서상욱 프란치스코 목천 장자동 1866.12 (약20세) 청주
배 바오로 목천 소학골 1867. 6. 19 (61세) 서울(교수)
김성회 바오로 목천 복구정 1864. 4 (46세) 서울(교수)
김 사도요한 목천 복구정 1868. 4 (30세) 서울(교수)
배 안드레아 목천 소학골 1868. 6. 23 (35세) 서울(교수)
배화첨 베드로 목천 소학골 1868. 5. 17 (56세) 서울(교수)
조덕삼 시몬 목천 공심리 1870 (?) (38세) 서울(교수)
김 도미니코 북면 베장골 1869. 죽산
김인원 북면 베장골 1869. 죽산
윤 바오로 목천 서들골 1867. 청주(교수)
최 안드레아 목천 소학골 1868. 7 (21세) 죽산(교수)
이 요한 목천 서들골 1871. 3. 19 서울(교수)
이 베드로 목천 서들골 1871. 3. 19 서울(교수)
이 프란치스코 목천 서들골 1871. 3. 19 (21세) 서울(교수)
배명중(혹 배원성) 바오로 목천 소학골 1878. 4. 10 (50여세) 서울(교수)
배문보(혹 배일룡) 요한 목천 소학골 1878. 4. 10 (19세) 서울(교수)
김 아가타 홍산 방고개 (36세) (교수)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

신리성지


신리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815)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 사무실 : 041-363-1359
- F A X : 041-363-7200
홈페이지 http://www.sinri.or.kr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이용
◎ 서울 남부 : 남부터미널 합덕행(1시간 40분 소요) → 택시 이용
◎ 서울 강남 : 강남터미널 당진행(1시간 30분 소요) → 합덕행 버스 → 택시 이용
◎ 대전 : 동부터미널 당진행(1시간 30분 소요) → 합덕행 버스 → 택시 이용

◈ 자가용 이용
◎ 강남권 : 양재I.C → 과천 의왕간 고속화 도로 → 일산외곽순환도로 → 서서울I.C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 I.C → 합덕방향(34번 국도 → 32번 국도)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강북권 : 서울 외곽순환도로 → 서서울I.C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 I.C → 합덕방향(34번국도 → 32번국도)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강서권 : 서부간선도로 → 안산 → 발안I.C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 I.C → 합덕방향(34번 국도 → 32번 국도)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인천 : 서해안 고속도로 → 당진 I.C → 합덕방향(34번 국도 → 32번 국도)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대전 : 당진 대전 고속도로 이용 → 고덕 I.C → 합덕 방향 → 32번국도 예산 방향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부산 &대구 : 경부고속도로이용 → 회덕 JC(당진, 세종 방향) → 유성JC(당진 대전 고속도로 → 고덕 I.C → 합덕 방향 → 32번국도 예산 방향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 광주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 I.C → 합덕방향(34번 국도 → 32번 국도) → 신석교차로 → 신리성지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솔뫼성지 > 합덕성당 > 신리성지 > 여사울성지

성지소개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신리성지사진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더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신리성지사진

그뿐만 아니라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시설안내

:: 생가 - 주교관

신리성지사진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이곳에서 성 다블뤼 안 주교님께서 머무시면서 선교활동을 지휘하고,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기록했다.따라서 이 집은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며, 조선 제5대 교구청이기도 했다.
신리성지사진


:: 기념성당

신리성지사진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 외부 전경으로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건립하여 2006년 5월에 축성되었다.


:: 성당내부

신리성지사진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 내부로 대칭과 비율이 적절히 조화되어 밝고 편안한 느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 무명 순교자 묘지

신리성지사진
생가에서 약 2Km 북쪽에 위치한 공동묘지 내에 ‘무명순교자 묘지’가 안치되어 있다. 1차 32기, 2차 14기 총 46기의 줄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 거더리

신리성지사진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르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등 네 성인이 순교를 위해 스스로 붙잡히신 곳.

:: 성지 전경

신리성지사진


신리성지사진

신리성지사진

성 손선지, 성 정문호 고향

부여지석리성지


지석리대표사진 관할 본당 홍산성당
(우33199)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산로 53-14
- 사무실 : 041-836-0067
- F A X : 041-836-1556
주소 (우33212)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368-1 찾아오시는 길

충남 부여읍에서 서천 방면으로 4번 국도를 따르다 보면 홍산면 소재지에 이른다. 여기서 좌측으로 난 613번 지방도를 따라 3.4km쯤 가면 일흥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가 된다. 여기서 충화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2.8km 지점 길 좌측에 지석묘가 있다.

성지소개


부여지석리성지사진

성 손선지 , 성 정문호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손선지의 종씨들이 비신자로 살고 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본당에 밭을 기증했다고 한다.

:: 성 손선지(베드로)
손선지는 성운 이라고도 하는데 1820년 아버지 손달원 (이냐시오)과 어머니 임 세실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세하여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다. 1837년, 불과 17세의 나이로 샤스땅 정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여 활동하였다. 김 루시아와 결혼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장남 손순화 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이주하여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담배농사를 주업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곳에서도 전교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집은 공소로 사용되었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전주 감영에서 나온 포교들에게 잡혔다. 포교는 손선지를 "사학의 괴수" 라 하여 앞세워 끌고 갔다. 향리 오사현이 찾아와 "천주교을 믿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포교와 의논하여 빼내 주겠다" 고 했으나, 그는 "나는 이미 죽기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소. 당신이 그런 유혹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일이오"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포교들은 손선지를 심문하여 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했지만 , 팔이 부러지고 만신창이 가 도어서도 그리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니문하는 영장에게 자신은 생명을 바쳐 천주를 믿을 것임을 단호히 밝혔다. 내일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손선지는 함께 갇혀 있던 김사집에게 옷을 벗어 주면서 "나는 내일 죽을 몸이니 이 옷은 쓸모없다" 며 입으라 하였다.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될 때가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 예수 마리아" 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일명 기식이라고도 하며 1801년 충남 임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 하였고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였다.
그는성품이 온화하고 예의가 바르면 행동이 모범적인 인격자였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식이 많고 신앙심이 깊어 외교인과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수계 생활을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년 가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의 손길이 그가 살던 신리골에도 뻗쳐오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5일 저녁,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신리골에 담배를 사러 상인들이 출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주 진영의 포교들이 담배상인으로 가장하고 정문호의 지베 들이 닥쳤다. 그리고 " 천주교를 믿는다" 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같은 마을에 살던 손선지, 한재권과 함께 전주 진영으로 압송하여 진영 앞 구류간에 수감했다.
이곳에는 앞서 잡혀온 조화서, 조윤호 부자와 이명서, 정원지 등의신자들도 있었다. 노구의 정문호는 3차에 걸쳐 심문을 받는 동안,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치명하자는 조화서의 권고와 격려를 받고 마음을 바로 잡아 치명키로 결심했다.그래서 영자에게 '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고 서슴없이 말했고 열심히 기도를 바치면서 마음의 평온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
12월 13일, 그는 감옥을 나와 형장으로 가면서도 기쁜 얼굴로 열심히 기도 드렸다. 그리고 함께 형장을 가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오늘 천당 과거시험을 보러가고 있으니 오늘이야 말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오" 하였고 일행들도 그의 말에 동의 하였다. 정문호는 자기 차례가 되어 휘광이가 칼을 내리쳤지만 칼이 빗나가자 고개를 들고 휘광이를 바라보며 "어찌 하여 단칼에 목을 치지 못하느냐?" 하고 호령했다. 세번째 칼에 목이 잘렸는데 그이 목에서 흰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나이 65세 였다.
현재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

내포지역 선교의 중심지

합덕성당


합덕성당사진 주소 (우31812)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 사무실 : 041-363-1061
- 유스호스텔 : 041-363-1064
찾아오시는 길

합덕읍내에서 예산 쪽으로 32번 국도를 따라 1.5㎞ 정도 가면 길 오른쪽으로 있는 서야 고등학교 바로 전에 합덕성당과 유스호스텔이 위치한다. 주변에는 합덕제와 수리민속박물관등이 있다.

성지소개

합덕성당사진

:: 본당설립
합덕성당은 올해(2009년)로 본당설정 119주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2010년)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내포지역은 오래 전부터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고 할 만큼 교세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1860년대 초 베르뇌 주교님께서 전국을 선교사가 상주하는 8개의 지역으로 나눌 때에 내포지역은 상부내포와 하부내포로 나눌 정도였습니다. 상부내포의 중심지는 홍성이었고, 하부내포의 중심지는 예산의 고덕이었습니다. 고덕면은 합덕읍과 바로 접해 있는 지역으로 메스트르 신부님과 랑드르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황무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 황무실이 바로 합덕성당의 전신이 됩니다.
내포지역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박해를 감수하며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한불수호 조약으로 조선에 전교가 비교적 수월해져 1890년에 교회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땅에 성당을 세우고, 초대 주임신부님으로 퀴를리에 신부님이 부임하시게 됩니다. 퀴를리에 신부님께서는 황무실 아래에 있는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양촌과 지척에 있는 신리와 거더리 공소는 다블뤼 주교님, 위앵 신부님, 오매트르 신부님께서 거처하셨고, 체포되신 곳입니다. 퀴를리에 신부님께서는 교우들의 숫자보다는 이러한 것에 의미를 두어 양촌에 자리를 잡으셨지만, 1898년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고, 큰길가에 위치해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금의 합덕 성당자리로 본당을 옮기셨습니다. 1898년에 본당을 이전하면서 사제관과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을 보았습니다.

합덕성당사진

:: 문화와 사회복지 활동
합덕성당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들어온 곳입니다. 합덕성당에 세워진 매괴학교는 한말 애국계몽운동 시기 천주교가 교육계몽와 전교활동의 일환으로 1907년 세운 당진지역 최초의 신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합덕성당은 1908년부터는 인근에 부모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각 교우 가정에 양육비를 지급하며 기르게 하는 사회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성영회(Saint Enface)는 1843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고아 구호 단체로 죽을 위험에 처한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함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1852년 입국하신 메스트르 신부님께서 도입하셨습니다. 1939년경에 이르면 고아원 아동 수가 300명을 돌파하였고, 1947년에 백 필립보 신부님께서는 성당 한쪽에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성가소비녀회를 청하여 고아원 운영을 담당시켰습니다.

:: 성모승천대축일과 성체거동
합덕성당은 성모승천대축일이 되면 성당 계단 밑에서부터 신작로 삼거리까지 합덕장의 상인들과 인근 지역의 보부상들이 몰려와 장터가 개설되어 대축일을 더욱 흥겹게 만들었습니다. 1931년도 성모승천 대축일에는 연 이틀 동안 2천 명의 관중들이 성녀 소화 데레사의 성극을 관람하였다고 합니다. 또 백비리버 신부님께서 1950년 8월 14일에 성사를 주시다가 인민군들에게 잡혀가셨기에 합덕성당의 성모승천대축일은 더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합덕성당의 장관을 이루는 행사는 바로 성체와 성혈대축일에 거행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이 성체거동은 6,25때도 거행되었는데, 이 성체거동은 신자들에게 대축일을 알리고, 성체신심을 키우며, 지역 주민들과 일치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성체거동은 매년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거행될 예정입니다.

합덕성당사진

:: 착한목자와 착한 양
합덕성당의 유명하신 신부님으로는 페랭 백문필(필립보) 신부님이십니다. 페랭 신부님께서는 1921년부터 1950년까지 합덕성당에서 사목하셨는데 신자들은 신부님을 성인으로 존경하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신자들은 신부님께 피난을 권유했지만 착한 목자이신 신부님께서는 양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시다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시게 됩니다. 이때 착한 목자를 따라가신 분이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님과 송상원 요한 복사님이십니다.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착한 양들이 목자를 위해 목숨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또 심재덕 마르코 신부님께서는 장티푸스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시고 옮으시어 병사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니 합덕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성소의 요람이 되어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하게 됩니다.

합덕성당사진


합덕성당사진

:: 원시장 원시보 우물터

합덕성당사진

박해중에도 신앙을 꽃피운

황무실성지


황무실성지 대표사진 관할 본당 신합덕성당
(우31812) 충남 당진시 합덕읍 굴미2길 40
- 사무실 : 041-362-5947
- F A X : 041-363-5947
주소 충남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성지소개


황무실성지

1791년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5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파묘 사건으로 촉발되어 내포에서 2천명에 가까운 신자가 해미 등지에서 순교한 <무진박해>까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으로 2008년 8월 15일 교구 청소년대회를 시작하며 실시하는 도보성지 출발지 중 하나이다.

1. 황무실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 중의 하나로 황무실 인근에서 살다 1793년 1월 28일 홍주옥에서 동사형(凍死刑)으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하여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2. 그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등 내포 전역을 휩쓴 무서운 박해 중에도 황무실 신앙 공동체는 계속 보존되었다.

3.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신부의 스승인 메스트르 신부는 1853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1856년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으며 고아사업과 배론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맡아 사목하다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4. 조선교구 4대 교구장 장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을 8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그 중 충청도 홍주지방을 ‘성모성탄’ 공동체로 지명하여 1857년에 조선교구 부주교로 성성된 다블뤼 주교에게 맡겼다. 당시 홍주 지역의 교회 공동체는 황무실이 중심지였다.

5. 1861년 조선 입국에 성공한 홍 랑드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파견되어 한수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무실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활동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충청도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6.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 민 위앵 신부는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위앵 신부는 1865년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신리 성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유럽에서 당신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7. 신리 성지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아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이존창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 및 덕산 황무실, 솔뫼 등 초기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던 곳과 연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 서부지방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수로를 통하여 이어져 있었고, 신리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8. 1890년 8월 조선교구장직무대행인 코스트 신부는 황무실 공동체에서 뻗어나간 양촌(예산 고덕면 상궁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퀴를리에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게 하였고, 예산 간양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파스키에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868년 해미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낸 무진박해 이래 22년만에 2개의 정식으로 본당응 충청도에 설립하였다.

9. 이 같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가 있던 황무실 사적지는 1970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성당으로 이장하면서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다 돌보지 않는 사적지가 되었다. 지금은 성물(십자고상, 묵주)을 간직한 무명의 순교자 또는 신자들의 묘지들이 사적지를 지키고 있다. 황무실은 외교인의 가족묘역으로 변해 비신자의 소유지가 되어 있다. 1970년 이전까지 합덕 교우들은 솔뫼성지처럼 황무실을 신앙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자주 순례하며 신부님들과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다. 어른 교우들은 자녀들에게 황무실 공동체에 대하여 들려주곤 하였다.

10. '황무실'은 달레 교회사나 관변문서에서 소위 <덕산> 또는 <홍주> 등으로 표기 되어 있다.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11. 사리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 올 수 있을 때는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쳐 서울 서강까지 왕래하였다. 하지만 조금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한양 교우들의 소식을 전해듯기 쉬운 길목이었다.

순교로 지켜온 120년의 믿음 터

공세리성지·성당


공세리성지성당대표사진 주소 (우31427)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 사무실 041-533-8181
- F A X 041-533-2087
홈페이지 http://www.gongseri.or.kr 이메일 E-Mail : psg748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평일 오전 11시 / 주일 오전 11시30분 찾아오시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이용 : 서평택IC에서 20분소요
경부고속도로 이용 : 안성IC에서 30분소요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공세리성당 > 솔뫼성지 > 합덕성당 > 신리성지

성지소개

:: 공세리 성지·성당은 네 가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성지이다.
첫 째로 한반도 전체에 걸쳐 아홉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자 대전교구 첫 번째 성당이며, 두 번째로 신유-병인박해 때 32분의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성지이고, 세 번째로 ‘예수마음 피정의 집’이 있어 교육기능을 담당하며 연 3만 명 이상의 피정 객들이 숙식을 통해 교육받고 있으며, 네 번째로는 “내포 지방 및 병인박해” 주제의 등록 박물관이 있다.

공세리 성지·성당은 근대 교회 건축 가운데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도지정 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어 연간 20만 명 이상의 내·외국인들이 찾고 있으니,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순교와 믿음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성당으로도 그 명성이 대단한 성지이다.

대전교구에서 최초로 설립(1890年)된 공세리 성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1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로서 조선조 성종 9年(1478年)부터 영조38年(1762年)까지 공세곶창고지(貢稅穀倉庫地)였으나, 1922年 10月8日 현재의 복음창고인 성당을 봉헌하였다.

공세리 성지·성당은 파리외방선교회의 에밀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成一論) 신부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장하게 된다. 에밀 드비즈 신부의 사목은 크게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나누어 볼 수 있다. 교육 사업으로는 조성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지역복음화에 앞장을 섰고, 의료사업으로는 서양 의술에 한방 기법을 결합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이른바 ‘성일론(成一論) 고약을 제조하였다. 이 고약은 이명래(李明來, 요한, 1890~1952)가 그 비법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세리 성당의 오랜 역사 안에는 1785年대 부터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살았던 교우 촌이 형성되었으며, 신유(1801)―병인박해(1866)를 맞아 신앙을 증거 하다 32분의 선조들이 수원, 서울, 공주에 끌려가 고문 ·옥사· 참수형 등으로 순교하게 된다.

한편, 순교자들의 유해를 대부분 성당으로 모시어 납골식 순교자 현양 탑을 건립하여 32분의 유해와 묘석 대를 모시고 있으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를 마련하여, 방문하는 순례 객들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순교로 지켜온 120년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득 담아가고 있는 믿음 터이다.

공세리성지성당사진


더욱이 공세리 성당 박물관은 옛 사제관을 개조하여 등록 박물관으로 봉헌함으로써 초대 한국 천주교 신앙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신앙의 체험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봉헌 된 박물관은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교우 촌 생활과 신유-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 모습에서부터 1950년 6.25때의 순교자들의 모습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 성녀 루이스 드 마릴 락의 유해와 32분의 순교자 유해를 비롯한 15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공세리 성지·성당 박물관은 정기적으로 신앙의 선조들이 간직하던 십자가, 성상, 기도서 등의 유물을 특별 기획전시하여 신앙인들에게 기도하며 묵상할 수 있는 곳으로서 다가가며, 온갖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순교하신 분들의 삶과 흔적(痕迹)을 만날 수 있도록 순례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문화의 장(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수 마음 피정의 집’이 있어 순례 객들이 순례의 향기를 가득 담아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 피정 프로그램
- 성월(성모성월, 예수성심성월, 순교자성월, 묵주기도성월, 위령성월)에 따른 피정
- 전례시기(대림, 성탄, 사순, 부활)에 따른 시기별 전례프로그램
- 순교 교육 프로그램
- 단체의 성격에 따른 차별화된 프로그램(주일학교, 청년회, 구역·반장, 꾸리아, 사목회, 노인대학)
- 성경을 통한 피정 프로그램
- 영상을 통한 피정 프로그램
- 거룩한 독서에 의한 성경읽기 프로그램
- 떼제와 함께 하는 참회예절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신자들에게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교육의 장(場)으 로 제공 되고 있다.

공세리성지성당사진


공세리성지성당사진

한국의 베들레헴

솔뫼성지


솔뫼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754)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 사무실 : 041-362-5021~2
- F A X : 041-362-5524
홈페이지 http://www.solmoe.or.kr 이메일 E-Mail : solmoe182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오전 7시, 11시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방법
① 서울에서 오실 때- 동서울터미널(하루2번),남부터미널(하루6번)을 이용하 시면 됩니다.
② 다른지방에서도 합덕으로 오시는 차편을 이용하시면 되겠습니다. ③ 합덕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택시를 이용하시면 3분거리(1.5km)입니다.

◈ 승용차를 이용하는 방법
① 서해안 고속도로 하행선일 경우(송악IC),상행선일 경우(당진TG)에서 합덕,예산 방향으로 나오셔서 32번 국도를 타시고 15~20분 정도 오시면 솔뫼표지판이 나옵니다
② 대전 아래 지방은 호남고속도로 유성IC와 북대전IC 사이에서 시작하는 당진-대전간 고속도로를 이용 고덕IC에서 내리시면 솔뫼 이정표가 나옵 니다(고덕IC에서 솔뫼까지 약12km(15분 소요)

성지소개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다.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새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세 무렵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솔뫼성지사진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와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동료 최양업 부제와 외국선교사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24일 가경자, 1925년 7월5일 복자품,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니라 최초의 서양학 유학생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나라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신부 생가 복원을 결의하고 2004년 9월 22일 생가 안채 복원을 완성하였다.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제146호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2005년 10월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완공하였다.

2014년 5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 사적지 제529호로 등록되었고 2014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제3회 한국청년대회가 대전교구에서 개최되면서 이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시어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을 솔뫼성지에서 가지게 되었다. 교황님께서 솔뫼성지에 다녀가 신 후 이를 기념하고자 2015년부터 매년 8월 14일-15일 이틀간 프란치스코 데이 행사를 가지고 있다. 2017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알려주신 매듭을 푸시는 성모 신심을 기억하고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경당”을 봉헌하였다.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솔뫼성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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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머리(한정리) 순교자 묘 성지

신평원머리성지


신평원머리성지대표사진 관할 본당 신평성당
{31741)충남 당진시 신평면 신평길 63
- 사무실 : 041-363-6761
- F A X : 041-363-6764
주소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이용시
서울, 천안, 대전 → 신평면 거산리 정류장(또는 삽교천) → 신평 성당 → 원머리(한정리)성지 (도보로 이동)

◈ 자가용 이용시
서해안 고속도로 → 송악IC(당진IC) → 신평 성당 → 원머리(한정리)성지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 → 당진IC → 신평 성당 → 원머리(한정리)성지

성지소개

원머리(한정리)성지는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평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으로 과거 지명은 원머리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이며 염전과 농사를 주로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병인박해 때는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지금 한정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태진(마지아)과 박선진(마르코)은 무진년(1868년) 수원 감옥에서 순교한 분이다.
순교자 박선진(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 사촌 형 마티아와 함께 수원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형을 깨우쳐, 이에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옥에 갇힌지 15일 후 같이 순교하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찾아 이 곳 원머리에 안장하였다. 이 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그 후 박 선진(마르코)와 박 태진(마티아)의 묘는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고 현양비를 세웠다.
이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출신 14분 순교자들의 기록을 치명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박 회장, 유서방, 김동 4인은 정묘년(1867년)에 홍성(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은 무진년에 홍주에서 같이 순교하였으며, 원씨,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닐라, 양정수, 양 아우구스티노 4인이 병인년(1866년)에 홍주에서 순교하여 치명하셨으니, 이 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2000년 성전을 신축하면서 재정비했다가 2009년 교구 성지 위원회의 결정과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재가를 얻어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그해 11월 3일 본래 모셔져 있던 원머리로 유해를 옮겨 모시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세우고 재정비 하였다. 신평원머리성지내에도 20여년간 모셔져 있던 자리에 기념비가 건립되어 순교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 2000년 4월 4일 성전 신축 당시 순교자 묘역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이장 후 현재의 원머리 순교자 묘역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박선진(말구), 박태진(마디아) 의 묘
신평원머리성지사진


:: 한정 공소 모습
신평원머리성지사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신앙을 증거한 자리

진산성지


진산성지대표사진 주소 (32700)충남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 사무실 : 041-752-6249
- F A X : 041-752-6247
홈페이지 http://jinsan.djcatholic.or.kr/ 이메일 E-Mail : ij2066@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 주일 오전 10시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이용
대전서부터미널에서 34번 버스 (금산에서 진산행 버스)를 타고 진산면에서 하차.
성지까지 5km는 택시로 오세요. (성지 앞을 지나는 버스는 하루 4대 뿐입니다)
※ 택시 휴대폰 번호 010-6423-6225 011-433-4632 (예약요망)

◈ 자가용 이용
경부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에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안영IC로 나와 고가도로 아래 사거리에서 좌회전후 복수방면으로 계속 직진, 8.3km 전방 선무교차로에서 우회전 후 다리 건너 다음 사거리에서 태고사, 수락계곡 방면으로 직진, 4.2km 전방 우측입니다.

성지소개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진산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이다.
윤지충은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스스로 교회서적을 읽고, 3년 동안 교리를 받은 후에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연 야고보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 사촌 동생인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이후 권상연은 다른 학문을 접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진산성지대표사진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가 태어난 계기가 된 진산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그 해 5월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바오로)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종 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패륜으로 받아들여졌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에 나아가 자수함으로써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다.

두 분은 참수 당하기 전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윤지충은 “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진산사건 이후 이 지역에는 천주교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지방리공소가 그 중 하나이다. 지방리공소는 본래 가새벌(병인박해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김영삼, 1877년에는 동생인 김요한, 1878년에는 김춘삼이 가새벌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지방리공소는 본래 가새벌에 있었으나 1927년 교우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고 1929년 초대 주임신부를 모셨으나, 1931년 성직자 부족으로 다시 공소가 되었다가 2009년 이곳을 진산성지 · 성당 (등록문화재 제682호)으로 복원하였다.

진산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의 두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진산성지대표사진


◈ 복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의 초상화는 헌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 저작권 승인을 얻어 게재함.

무명 순교자 생 매장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1957)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 사무실 : 041-688-3183
- F A X : 041-688-9039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이메일 E-Mail : mbh7799@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해미성지약도

성지소개


:: 수많은 이름 모를 신앙 선조들의 순교성지

해미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점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박해(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 이외에도 해미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그 중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진영에서의 천주교 신자 처형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년동안 처형된 숫자는 수천 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해 동안에 해미진영(지금의 해미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내포 지방에서 한티고개를 넘어 끌려 온 천주교 신자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이곳에서 10년간 옥살이 중 옥사하였다). 이 감옥 앞에는 당시 손발이 묶이고 머리채가 묶인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가 지금도 그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이러한 감옥 터를 1950년대에 해미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였고 순교 기념비만 세워 놓았다. 그 후 오늘날 그 터의 교회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진영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석형, 동사형, 백지사형 등으로 죽였다. 특히 이곳은 다른 순교지에서는 볼 수 없는 처형방법이 있었는데, 즉 자리개질이라 하여 돌다리 위에서 서 너 명이 천주교 신자의 팔다리를 잡고서 들어 메쳐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해미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돌은 1956년에 서산 동문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본래 위치로 옮겨져 순교 현양비와 함께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2009년에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성지로 옮겨와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고, 현재 서문 밖 순교지에 있는 자리갯돌은 모조품이다.

해미성지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신자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편리함을 위해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곧 해미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나가 아무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 사람들을 묶은 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묻어 버리는 방법을 말한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신자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개울 한 가운데에 있는 둠벙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지역 외인들은 천주학 죄인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둠벙” 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이름조차도 변하여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으며 이때 나온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1935년(일제강점기)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아래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이 있었는데, 그 때 발견된 유해와 유품 성물은 이곳 순교 터에서 12㎞ 떨어진, 당시 성당이었던 상홍리 공소 근처 백씨 문중선영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95년 9월 20일에 순교자들이 치명하고 묻혔던 성지로 유해를 다시 모셔오면서 치아를 비롯한 일부 유해는 보존 처리하여 유해 참배실에 모셔 순례자들이 직접 보고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머지 유해는 해미 순교탑 앞에 무덤을 마련하여 안장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겨우 132명만이 성이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외는 모두 무명 순교자들이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 중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은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고을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서민층의 신자들은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이곳에서 처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수천 명 해미순교자 가운데 초기 순교자인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3분만이 시복되었을 뿐이다.

성지 조성과정 : 1935년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이곳이 순교지임이 밝혀졌지만, 1975년에 세워진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만이 이곳이 성지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였다. 그러다가 1985년 4월에 해미본당이 설립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되었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이곳 생매장 순교지를 1998년말까지 약 7000여 평 확보하였다. 그리고 2000년 2월에 성지와 본당이 분리되어 성지전담 사제가 파견되었다. 후원회원들의 성금으로 2003년 6월에 성전이 건립, 봉헌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순교자들이 이곳까지 죽음의 행렬을 하면서 기도하던 “예수 마리아! 예수마리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당시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오늘날에는 “여숫골” 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해미성지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

황새바위순교성지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541) 충남 공주시 왕릉로 118
- 사무실 : 041-854-6321~2
- F A X : 041-854-6323
홈페이지 http://www.hwangsae.or.kr 이메일 E-Mail : hsbw1@naver.com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월요일 오전 9시 30분,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 공주 신터미널 - 125번, 101번 버스 이용 ‘공주중학교’ 하차
◎ 서울남부터미널 ? 공주 구터미널 - 도보 10분(125번, 101번 버스 이용 가능)
◎ 자가용 이용시 ‘공주시 교동 1-41번지’ 또는 ‘공주교육지원청’ (맞은편) 검색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공주지역 순교터 6곳
황새바위성지> 충청감영터(포정사)> 향옥터(교동성당)> 진영터> 중동성당> 장깃대나루)

성지소개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순교탑 무덤 경당
황새바위성지대표사진
형구돌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인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100년간의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에서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며 고귀한 피를 흘렸던 거룩한 땅이다. 예로부터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하여 황새바위, 또는 죄수들이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쓰고 처형당한 곳이라 하여 항쇄바위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를 남기며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이 된 순교지이다. 교회사가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공주에서 순교하신 분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수는 오직 천주님만이 아시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공주에는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감영이 있었다. 따라서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에서 사학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황새바위 앞 제민천변에서 참수 처형을 당하였다.
그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이 있을 때면, 맞은편 공산성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처형된 순교자들의 머리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시키기 위해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았으며, 시신은 일반 죄수들과 섞인 채 제민천에 버려져 금강을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또한 더 많은 숫자의 순교자들이 향옥(환옥)에서 교수(絞首 : 목을 옭아매 죽이는 것), 옥사(獄死 : 고문이나 벌 때문에 감옥 안에서 죽는 것), 아사(餓死 : 굶어 죽는 것), 매질 등으로 죽어 갔다. 교회사가 달레는 향옥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밧줄을 죄수의 목에 씌우고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내면 옥 안에서의 신호에 따라 밖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 당겨 죽인 후 시체를 밭에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다가 교회 사료들(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과, 관변기록(일성록, 승정원일기, 사학징의)등 을 통하여 현재 공식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도 337위이며, 아직도 그 이름이 밝혀지고 있는 순교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103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국승 바오로, 김원중 스테파노가 124위 복자품에 올랐다.

또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와 10명의 회장들을 비롯하여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의 칼을 받고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다. 순교자들의 고결하고 용맹한 정신은 오늘도 이곳 황새바위에 푸르게 살아 우리 후손들과 함께하고 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다. 특히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병인박해(1866년) 이전의 순교자들에게 많이 나타나고, 대표적인 순교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와 이국승 바오로이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 처형되었고, 기해박해(1839년)에는 전 베드로가 처형되었다. 또한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가장 많은 수의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며, 순교의 역사는 기묘년(1879년)까지도 계속된다. 또한 금강 공주대교 아래의 장깃대 나루에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프랑스 죠조 (Jozeau: 1866-1894) 신부와 그의 시종 정보록 바오로가 순교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년 순교 역사의 기록을 가진다.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일찍부터 관찰사와 감영이 위치해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곳이다.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337명 순교자들의 이름을 찾아내게 되었다.

공주는 한국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성모신심회가 창설된 곳이다.

1846년 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고,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공주 수리치골에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2일 수리치골의 한 오두막에서 한국천주교회 최초로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1861년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들의 관할 구역을 재정비하면서 공주와 그 인근 지역을 ‘성모영보’ 구역으로 설정하게 된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신앙의 의미를 배우는 교육의 장소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교육하는 장소이다. 순교의 삶이 현세의 삶과 비교하여 신앙의 가치를 깊이 묵상하게 하는 기도의 장소인 것이다.

황새바위성지


황새바위성지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사진 관할 본당 삽교 성당
(우:340-905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신가꽃산길 111
- 사무실 : 041-338-1924
- F A X : 041-338-1923
주소 우:32412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270-23

성지소개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삽교천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리 도리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삽교읍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히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고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1817년 10월, 박해자들의 손길이 뻗쳤다. 해미 포졸들이 갑자기 배나드리에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간 사실로 보아 밀고자의 소행이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해미로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 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요셉), 손연옥(요셉), 민숙간 등은 혹동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옥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마도 이때 배교하고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배나드리 교우촌은 없어졌다.

:: 인언민(마르티노)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이다. 덕산현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을 닦다가 진사출신의 황사영(알렉산델)과 친분이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단지에 넣어 삽교천에 던져버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는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하였고, 빈민구제에 자기의 재산을 모두 바쳐 인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아들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 놓고 공주로 이주한 인언민은 1797년 박해 때 이미 신자로 이름이 드러나 있었으므로 즉시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주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원의를 나타냈다. 이후 그는 감사의 명대로 공주와 청주, 해미 옥으로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갖은 형벌과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음을 알고는 대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졸들은 이 명에 따라 돌로 쳐서 턱뼈와 갈비뼈를 부수고, 온몸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1798년 12월 5일 목숨이 서서히 꺼져 가는 중에도 마르티노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치는 거야"라고 여러 차례 되뇌이면서 63세로 순교의 영광을 드러냈다. 현재 용동리 교우촌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배나드리 교우촌


배나드리 교우촌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발상지

수리치골성지


수리치골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524 충남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 피정의 집 : 041-841-1750
- F A X : 041-841-7980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주일 오전 11시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 성당)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이용
유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갑리행 버스를 타고 수리치골(수녀원)에서 내립니다.
* 상갑리행 버스 시간: AM 8:50, PM 1:50, 5:10, 7:25
  (수리치골까지 20~30분 소요됩니다.)
* 유구행 버스 시간: AM 9:10, PM 2:10, 5:30, 7:45
  (수리치골성지는 중간 경유지로 버스 시간이 정확치 않습니다.)

◈ 자가용 이용
대전-당진 고속도로: 마곡사 IC에서 유구 쪽으로 직진
 - 산정교차로에서 청양(부여) 방면으로 좌회전
 - 청홍삼거리에서 봉갑리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직진
 -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 도로로 오시면 됩니다.(좌측은 끊긴 길입니다.)
* 내비게이션으로 ‘수리치골성지’를 검색하시면 됩니다.

수리치골약도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황새바위순교성지, 청양다락골성지

성지소개

수리치골성지는 박해 시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이 숨어 살게 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유서 깊은 신앙의 요람지이자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와 티없으신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최초로 생겨난 장소이다.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5대 교구장)는 한국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 시작된 병오박해가 끝나갈 무렵, 수리치골 교우촌의 한 오두막에서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1846년 11월 2일)하고 ‘성모성심회*’ 조선 분회를 조직하였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 승리의 성모성당 주임 데쥬네트 신부가 설립한 신심 단체로 성모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의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찾으면서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수리치골은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한국 방문 당시 이곳 성지의 교회사적인 가치를 언급하면서 한국교회의 사적지로서 인정받으며 다시금 교회 관심을 받게 되었다.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겨레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하셨습니다.”

(1984.5.6. 명동성당에서)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설립자 정행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는 1985년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여러 차례의 탐문조사와 현장방문을 통해 1986년 현 수리치골성지의 위치를 확인하였고, 대전교구 경갑룡 주교와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의 허락을 얻어 성지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8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로 ‘한국 교회의 성모성심 신심과 수리치골’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려 ‘성모성심회’의 창설지가 현 수리치골임을 확증하게 되었다.

신앙의 전성기에는 백여 호의 신자 마을이 형성되었던 수리치골.

“저는 6개월 후에 이 초라한 오두막에 다시 가서, 주일날 우리가 평소에 하는 신심 기도를 했습니다. 일요일마다 우리 신자들이 조선말로 기도를 바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수많은 언어로 마리아를 찬미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모든 민족들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는지요!

좋으신 어머니께서 많은 나라에 내려주신 수없이 많은 은혜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1847년 10월, 성 다블뤼 주교가 부모님께 보낸 서한 中)


:: 순례묵상
1. 성모성심회가 처음 결성된 파리의 승리의 성모성당은 1674년도부터 ‘죄인들의 피신처이신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신자들은 수리치골성지를 방문함으로써 죄인들의 피신처이신 성모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특별히 회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한다.

수리치골성지사진

2. 수리치골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구체적으로 발아되고 이를 명시적으로 구현한 독특한 장소이다. 파리의 성모성심회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매일 성모성심과 한 마음으로 작은 선행을 한 가지 할 것을 회칙으로 삼았듯이 순례자들도 이를 결심하고 실천하는 은혜를 구한다.

3. 수리치골성지에는 성모성심의 모범을 따라 세상과 교회 안에 이를 증거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과 본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과 교회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본받아, 교회를 향한 ‘영적모성 실현’에 주력하는 수녀들은, 도덕성과 존엄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드러나지 않는 희생과 기도를 배상의 마음으로 바치고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진정한 복음 실현에 헌신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도 교회와 성모님이 제안하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수리치골성지사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하였다.”고 이 장소를 공식적으로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수리치골은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마리아의 단체들에게 하나의 성지가 되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여기서 생겨났으며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기존의 성모신심 단체들은 체계화된 조직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각 지역별로 독립해서 존재해 있었고 그나마 박해를 거치면서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성모성심회는 성모공경을 주로 하는 신심 단체이지만 죄인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단체의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체가 설립된 시기가 박해 시기이고, 또 선교사들이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직했다는 사실은 성모성심회가 단지 순수한 신심단체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를 집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 순례 안내
1. 조선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한 오두막집이 있던 자리 인근으로 ‘십자가의 길’ 이 조성되어 있다.

2. 새롭게 조경을 한 성지 광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고상과 승리의 성모상이 마련되었다.

3, 순례자들에게 개방된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 성당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칠고)과 일곱 가지 기쁨(칠락)이 표현되어 있다.

수리치골성지사진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 터

여사울성지


여사울성지성당대표사진 주소 (우32417)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 사무실 : 041-332-7860
- F A X : 041-335-0641
이메일 E-Mail : csy3212@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화요일 저녁 7시 30분, 수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 기차 이용시(서울-천안-신례원도착)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무궁화호,통일호 장항선행을 타고 천안역을 지나 온양온천역을 거쳐 신례원역 (약 1시간 50분 소요)에서 하차합니다.
신례원역에서 신례원 버스터미널 까지는 약 100m 거리
신례원 버스 터미널에서 합덕방향 완행버스(배차시간 :1시간에 1대)를 타고 약 3정거장~4정거장 정도 (약 10분 소요) 신종리 또는 여술(여사울의 준말)이란 곳에서 하차 합니다.

◈ 시외버스 이용시(서울-천안-신례원도착)

서울(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예산,홍성방향또는 당진,서산방향 버스를 타고 당진,서산방향일 경우에는 신례원을 지나는지 문의 하셔야 합니다.
신례원 터미널에서 하차 한 다음 합덕방향 완행버스(배차시간:1시간에 1대)를 타고 약 3정거장~4정거장 정도 (약 10분 소요) 신종리 또는 여술(여사울의 준말)이란 곳에서 하차 합니다.

성지소개

:: 여사울 성지-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충청남도지정 기념물 177호)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여사울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이며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의 빛이 전해진 곳이다. 이존창(루도비꼬 곤자가)사도의 생가지로 알려져 있는 이 곳 여사울은 내포 천주교회의 심장이며 신앙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서양의 선교사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시작이 되었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 바로 이 곳 여사울 출신인 이존창 사도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어느 누구도 이 곳 여사울 성지가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였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내포 천주교회와 여사울 신앙 공동체 중심에는 바로 이존창 사도가 언제나 한 가운데 있었다.
1785년 영세를 받고 고향 여사울에 돌아온 이존창 사도는 그의 학식과 아름다운 품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게 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능력으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을 그의 집을 찾아 왔다고 한다. 다블뤼 주교님의 기록에 의하면 “여사울에 살던 30여 가구가 넘는 그의 친척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 사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전교 대상이었다.
이처럼 이존창 사도의 전교 활동은 점차 신분과 지역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그만큼 많고 다양한 이들이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존창 사도의 전교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님의 집안이 입교했다는 사실이다.(이존창의 딸 멜라니아 :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의 둘째 아들 김택현에게 시집가 김대건 신부의 조모가 된다.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숙모가 된다)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이렇게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 공동체 였고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지게 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 2분의 성인, 2분의 하느님의 종, 여러 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도 하게 된다. 다블뤼 주교도 훗날 순교자들의 많은 수가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 때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존창 사도의 전교 활동은 곧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과 출발이었고 내포 천주교회는 바로 여사울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이렇게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고향으로서 신앙의 선조들의 얼이 숨 쉬는 우리 믿음의 고향이다.


:: 여사울 성지의 특징
1. 이존창 사도의 고향이며 그의 생가터가 있는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2. 여사울 신앙 공동체-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
3.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방, 샤스탕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체포되 순교를 한 홍병주(베드로), 홍영주(바오로) 형제 순교 성인들이 내려와 신앙 생활 한 곳.
4. 김광옥(안드레아), 김희성(프란치스코) 부자(父子) 순교자로 ‘하느님의 종’로 선정되신 분들의 고향이며 출신지.

여사울성지성당사진

최양업 신부 탄생지 / 무명 순교자 줄무덤

청양다락골성지


청양다락골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3312)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 사무실 : 041-943-8123
- F A X : 041-943-8124
홈페이지 http://www.daracgol.or.kr 이메일 E-Mail : msch65@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매주 화요일부터 주일 오전 11시 30분 찾아오시는 길

◈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시
1) 서울쪽에서
- 당진을 지나 대전당진고속도로를 타다가 예산IC에서 보령 홍성 방면으로 나옴
- 나와서 1㎞오면 응봉4거리에서 청양, 광시방면으로 좌회전에서 계속 직진해서오면(약20여분) 성지 갈색이정표 있음
2) 목포, 광주, 전주쪽에서
- 대천IC에서 나와 청양, 공주방면으로 17㎞ 오면 오른쪽 성지 갈색 이정표 있음

◈ 부산, 대구 , 대전에서 오시는 방법
- 대전 당진 고속도로를 타다가 공주 분기점에서 서천방면으로 오시다가 서공주 IC에서 나옴
- 서공주 IC에서 정산방면으로 정산에서 보령(대천해수욕장)방면으로 약30분 오시다 보면 왼쪽에 성지 갈색 이정표 있음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홍주성지에서 다락골성지, 혹은 다락골성지에서 갈매못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그러나 두 코스가 기본 30Km를 넘는 거리이기에 하루 코스는 불가능하다.
다만 화성면 읍내 버스 주차장에서 최양업 신부님 생가터를 거쳐 줄무덤성지까지 4Km 구간은 가능하다.

성지소개

청양다락골성지사진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는
청양다락골성지사진 1.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1821-1861)신부가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고,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성인의 탄생지이다.

2. 기해박해(1839)당시 이곳 다락골에서 숨어 사목한 모방 나 베드로(1803-1839)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1803-1839)신부는 당시 교구장이신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796-1839)주교의 편지 (“위급한 경우가 닥치면 착한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법이오, 그런 즉 아직 범선을 타고 떠나지 아니하였거든 포졸들과 함께 속히 이리로 오시오.”)를 받고 주교님의 뜻에 따라 순명(순교를 받아들인)한 곳이다.

3. 병인박해(1866)당시 공주와 홍주에서 치명하신 분들은 교우들과 가족들이 야음을 이용해 시신을 매장한 무명순교자들 묘소37기가 있는곳 이다.

4. 그 외 청양 다락골 출신 순교자들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분들은 다음과 같다. 이여삼바오로 (?-1812), 최봉한프란치스코(?-1815), 최해성요한(1811-1839), 최비르짓다(1783-1839), 이태권베드로(1782-1839), 최대종요셉(1790-1840), 이성례마리아(1801-1840), 임만억야고보(?-1868)등이다.

5. 청양출신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도기바오로(1798년 순교), 김풍헌토마스(1801년 순교), 황바오로(1813년 순교), 김시우 알렉시오(1815년 순교), 김화준야고보(1816년 순교), 김대권베드로(1839년 순교), 정화경안드레아(1840년 순교), 한재권요셉(1866년 순교), 박마티아(1866년 순교), 김에피파노(1866년 순교), 김영서예로니모(1867년 순교), 김그레고리오(1868년 순교)

청양다락골성지사진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청양다락골성지사진

신앙을 증거한 80년간의 순교터

홍주순교성지


홍주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223)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 사무실 : 041-633-2402
- F A X : 041-634-3217
홈페이지 http://www.hongjushrine.com 성지 미사 안내 매주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월요일 미사는 순례단체 요청시 미사 가능
찾아오시는 길

◈ 홍성역을 이용한 기차 순례 가능(용산역, 장항역 등에서 출발, 1~3시간 소요됨).

◈ 서울 강남 지역에서 출발하시는 경우
- 경부고속도로 진입하시거나,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셔서 조남분기점까지 오셔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면 편리합니다.
-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실 경우에, 네비게이션을 설정하시면, 아마 고덕IC로 빠져나오도록 안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덕IC에서 홍성까지 오시는 길이 2차선 국도이기때문에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덕IC로 나오시는 것보다 차라리 예산수덕사IC까지 오셔서 홍성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오히려 운전이나 승차하신 분들에게는 편리하실 것입니다.[신부님 각주 - 이것은 운전하면서 느낀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 잠실쪽이나 동서울 쪽에서 출발하시는 경우
- 잠실에서 송파IC를 이용하셔서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셔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는 것은 같습니다.
- 단, 동서울쪽에서 오신다면, 처음부터 동서울TG로 고속도로를 진입하셔서,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셔서 음성까지 오셔서, 평택-음성 고속도로를 이용하셔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전남-전북지역에서출발하시는 경우에는 그냥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 단, 전남-전북지역에서 오시는 경우에는 홍성IC까지 오시지 말고, 광천IC에서 고속도로를 나오셔서 홍성으로 오시는 것이 많이 편리합니다.

◈ 경상도 지역에서 오시는 경우
- 경상도 지역에서 오시는 경우는 정말 고속도로 이용이 편리합니다. 다만, 대전 까지 오셔서 유성분기점에서부터 대전-당진간 고속도로를 이용하시면 정말 편리하시리라 생각됩니다.
- 대전-당진간 고속도로 이용시에도, 예산수덕사IC로 나오시면 홍성까지 10분정도면 성지성당 앞까지 오실 수 있습니다.

성지소개

홍주성지대표사진

:: 홍주순교성지의 세 가지 특징
첫째, 박해 초기(1792)부터 병인박해까지 약 80년 동안 지속적으로 순교자들이 탄생한다. 홍주순교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현재 원시장(베드로),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등, 4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을 위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홍주성지대표사진
둘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다. 홍주순교성지는 예비신자들이 모범적으로 열심 수계하며 순교했다는 특징이 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3년간 예비자로서 수계하며 복음을 선포한 원시장(베드로)이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로 순교했다. 그리고 장장 22년간이라는 예비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 순교하기 직전 자기가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바오로) 가 ‘예비자들의 모범’이다.

셋째, 한국 천주교 순교사의 거점 성지이다. 서울에서 권 일신에게 세례를 받은 이존창이 예산 여사울에서 첫 선교를 하여 내포고을에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전국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전국에 복음이 전파된다. 그럼으로써 홍주순교성지는 복음전파의 못자리가 된다. 그 증거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주교는 1891년 10월 전국을 8개의 본당으로 나누었는데, 이중 4개 지역이 충청도에 있었고, 그 중 2개 본당이 내포(상부, 하부) 지역에 있었으니 그만큼 신자가 많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홍주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중심인 내포의 열개 고을을 관할하던 정3품 관찰사의 주둔지였다. 따라서 내포의 신자들은 체포되어 이 곳 홍주 목에 압송되어 신앙을 증거 하다가 대부분 홍주 옥에서 순교하게 된다. 홍주 옥에서 교수형이나 옥사로 113명이 순교하였다.

홍주성지대표사진

:: 홍주의 대표적 순교자들(약전)
- 하느님의 종 원 시장 베드로
1788년 입교하여 1791년 신해박해 여파로 체포되어 홍주 영장과 목사로부터 3~4회 걸쳐 영세도 받지 않은 예비신자의 몸으로 숱한 매질과 고문을 당한다. 그는 입교 2~3년 만에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주리와 치도곤 등으로 살 이 묻어나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을 가해도 죽지 않자 홍주 목사는 “ 저 놈은 틀림 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라고 외쳐대며 엄동설한 한밤중에 온 몸에 물을 뿌려 동사 시킨다. 1792년 12월 17일 (양력 1793. 1. 28) 61세에 순교하여 홍주 지역뿐만 아니 라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된다.

홍주성지대표사진 - 하느님의 종 방 프란치스코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 대할 수가 있겠소?” 하며 다른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간의 옥고 끝에 1798년 12월 16일 교수형으로 순교한다.

- 하느님의 종 박 취득 라우렌시오
면천출신 박 취득은 홍주로 이송되어 16번의 문초를 받는 동안 곤장과 몽둥이 등 도 합 1천 400대의 매를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 “나는 굶겨도 죽 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 라고 증언한 대 로 죽지도 않고 그의 모든 상처가 흔적도 없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자, 형리들은 이 광 경을 보고 놀라 요술이라며 그를 새끼줄로 목 졸라 죽인다. 1799년(기미년) 2월 29 일 (양력 4. 3) 30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 하느님의 종 황 일광 시몬
홍주의 백정출신 황 일광(시몬)은 1801년 12월 26일 15명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서 울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해읍정법에 따라 홍주에서 12월 27일(양력 1802. 1. 30) 45세의 나이로 참수된다. 그는 “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 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며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에 기뻐하며 순교하였다.


::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 터 3곳
- 홍주 옥(1871년 홍주목지도, 구 검찰지청 및 법원지원자리) : 113명(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이 순교한 최대의 순교 터이다.
- 생매장 터: 홍주성 밖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에 생매장터가 있다.
- 참수 터: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m지점


::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 한 장소 3곳
- 경사당 자리: 순교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당하던 홍주진영의 동헌(현. 한국통신 자리)
- 근민당 자리 : 홍주 목사의 동헌(현. 군청 뒤뜰)
- 저자거리 : 순교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던 장소(구. 예비군중대 터)


:: 성지 순례 코스
①근민당-> ②홍주 옥->③ 경사당-> ④저자거리-> ⑤참수 터->⑥생매장 터-> ⑦홍성 본당(미사 요청 시)

홍주성지대표사진 홍주성지대표사진

산막골·작은재줄무덤성지


작은재줄무덤사진 관할 본당 서천본당
(우33616)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안길 31-13
- 사무실 : 041-951-9014
- F A X : 041-951-9114
주소 작은재성지 : 충남 서천군 문산면 판문로624번길 153
산막골성지 :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81번길 119

성지소개

서천 천방산 산막골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신앙 선조들이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다블뤼 주교와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곳이다.
특히 페롱 신부는 이곳에서 총 6통의 편지를 작성했으며,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한 황석두 루카도 일가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다.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다.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작은재줄무덤성지사진

대흥봉수산순교성지


대흥봉수산순교성지대표사진 주소 (우32450)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
- 사무실 : 041-333-0202
- F A X : 041-333-0987
홈페이지 http://cafe.daum.net/bongsusan1801 이메일 E-Mail : bongsusan1801@hanmail.net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월요일 오전 7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찾아오시는 길 ① 대전당진고속도로예산수덕사IC-(홍성방향국도[21] 2.2km) → ② 응봉사거리(대흥방향지방도[616] 6.3km) → ③ 대흥의좋은형제공원주차장-(300m) → ⑤ 동헌·대흥면사무소앞주차장 → (동헌담장남측50m) → 성지사제관/성당

① 대전당진고속도로신양IC-(신양면소재지방향1.3km) → ② 신양사거리-(지방도[616]광시·대흥방향 8.5km) → ③ 동산삼거리(지방도[616]대흥방향 2.5km) → ④ 대흥의좋은형제공원주차장-(300m) → ⑤ 동헌·대흥면사무소앞주차장 → (동헌담장남측50m) → 성지사제관/성당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찾아오시는 길

성지소개

○예산 대흥면 예당호 수몰지는 조선시대 순교지이다.
○대흥봉수산성지는 다음을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 의좋은 순교복자 : 대흥 김정득 베드로와 여사울 김광옥 안드레아
  - 대흥고을 순교자 : 원 요셉(치명일기 99), 황 베드로(치명일기 119), 백청여(치명일기 258), 원지우 안드레아(치명일기 349), 이 루도비꼬(치명일기 451), 이 아우구스띠노(치명일기 452).
○조선시대 대흥군(대흥면, 광시면, 신앙면, 응봉면, 홍성과 청양 일부)에 산재된 교우 공동체


■ 대흥봉수산성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1801년)
대흥봉수산성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탄생하여 친척인 김광옥(안드레아)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정득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중에 숨어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속여서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pp. 109-113.


■ 대흥봉수산 성지 순례지

○대흥동헌 : 교우들이 심문과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하던 장소. 동헌 뒤뜰에 척화비가 있음.
대흥봉수산성지

○대흥 옥터 : 교우들이 가두고 배교나 순교를 선택할 기회를 주던 형옥터. 현재 대흥농협 창고터임.
대흥봉수산성지

○대흥 참수터 : 청양다락골에서 여사울을 향해 흐르는 무한천을 대흥 아사(衙舍) 앞에서는 내천(奈川)이라 불렀음. 예당호에 수몰된 내천변(奈川邊)이 조선시대 처형지였음.
대흥봉수산성지

도앙골성지


도앙골성지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193)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291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삽티성지→도앙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삽티→도앙골 3.5㎞)

성지 소개

현 보령시와 부여군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 능선의 북향 중턱에는 고찰 금지사(金池寺)가 위치한다. 금지사 본전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란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 하여 ‘도원곡(桃園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앙골은 ‘도앙골’의 신자 집에서 머물며 ‘삽티 교우촌’과 수시로 연통하며 은거하던 최양업 신부가 1850년에 귀국 후 최초로 장문의 보고서한을 작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이후 도앙골 신자들은 1866년에 모두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숨어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그 교우촌의 신자들이 모두 순교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이곳 역시 천주교회의 순례지로 중요성을 지닌다.
현재 도앙골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순교자 다섯 분의 이름이 밝혀졌지만, 여성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박해시기 이후 도앙골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가친척으로 추정되는 신자들과 더불어 많은 신자들이 공소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1890년대의 판공 통계에 의하면 50여명 신자들의 공소였다.
2010년 그 교우촌 지역 중 일부(580평)를 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시작한 도앙골성지는 앞의 ‘삽티 교우촌’과 연계하는 순례 구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도앙골성지대표사진
도앙골성지대표사진

■ 하부내포성지 소개
충청도 서북 지역의 삽교천 유역은 평야지대인데 그 지역을 고유하게 ‘내포’라 한다. 그런데 당시 교회의 선교사들이 산이 많은 고지대를 포함한 지역을 상부내포, 들녘 저지대를 하부내포라 하였다. 그와 동시에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는 행정 중심지였던 홍주(홍주목 : 현 홍성)를 상급 치소로써 ‘상부내포’지역이라 한 반면, 평야지대(덕산현 등)를 하급 치소로써 ‘하부내포’지역이라 구분하였음즉 하다. 그러던 관습에 따라 홍주의 하급 고을들이었던 아랫녘 보령과 남포, 비인, 서천, 홍산, 임천, 한산 등 금북정맥 남쪽 지역을 ‘하부내포’라 부르던 관행이 생겼던 것이다. 실제로 보령과 서천 지역에는 일명 ‘안개”(내포)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남포만,장구만,비인만 등의 포구 ).
이와 같은 하부내포 지역은 사실상 산악지대이다. 그러므로 금북정맥 북쪽의 삽교천 유역에 비하여 험한 산속의 오지가 많다. 그러한 오지에 점차 교우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 하부내포의 산악지역 오지에 교우들이 피신하여 살던 사연과그 신앙생활의 실상을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도앙골 발 최초의 서한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삽교천 유역의 평야지대(덕산,합덕,당진,아산,서산)에서 금북정맥 이남의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살던 신자들의 모습을 최양업 신부의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도앙골에서 작성하여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주와 신부께 조선에서 올린 최초편지 중 발췌)

서짓골성지


서짓골성지대표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514)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8-3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주일 오후 2시
※ 평일에는 순례자들 사전 연락에 따라 봉헌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완장포구→서짓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완장포구→서짓골 9.5㎞)

성지소개

서짓골은 부여군 지역이 아닌은 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의 한 마을이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면 서짓골은 남포현(현재의 보령시 지역)에 속하던 산골이다.
서짓골은 도앙골과 인근 신자들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유해를 이장한 곳이다. 갈매못에서 다섯 분이 순교하고 3일 동한 효수(梟首)된 후 모래사장에 마구잡이로 묻히게 되었다. 그분들 가운데 황석두 성인의 시신만 먼저 황씨 가족에 의해서 삽티에 옮겨 안장된다. 그러자 장주기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에게 가서 협조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서짓골의 신자들에게 찾아간다. 그때 서짓골에 살던 이 바오로와 그 아들 이치문(힐라리오)의 가족들이 선뜻 나서서 네 분의 순교자 시신을 갈매못에서 가까운 곳에 1차로 은밀히 이장한다.
이어서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요한 금구)을 만나 의논, 그로부터 경비를 충당 받고 멀리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사는 신 회장과 이치문 가족들의 추렴을 보태서 선박을 빌려 웅천천 하구까지 이동한 다음에 육로를 통하여 서짓골의 이 바오로 집 뒤 담배 밭에 안장하게 되었다. 그 이장 작업은 무려 15일 가량을 요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러한 이장 업적은 서짓골의 이씨 가족들과 도앙골의 김순장(요한 금구)의 주도하에 달성되었는데, 이 사실을 비추어보면 병인(1866)년 이전에 이미 서짓골과 도앙골은 열성적인 신앙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써 두 곳은 상호 긴밀한 연통이 이루어지던 공동체였다고 추정된다.
서짓골 마을은 1990년대에 축조된 보령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었다. 보령의 그 마을의 뒤로 명덕산이 있는데 그 산의 아랫자락 마을이 서짓골이다. 그 명덕산 비탈에 갈메못의 순교성인 4위의 시신을 안장해드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 성인들을 안장해드린 신자들이 발각되어 병인년에 서울로 끌려가서 또한 순교했다. 그리고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16년이 지난 1882년에 조선교구장 대리였던 블랑(Blanc·후에 조선교구 7대교구장 주교) 신부에 의해서 그 순교성인 4위의 무덤을 발굴 수습된 유해들을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에 옮겨 모셨다. 1894년에 그 유해들은 서울에 반환되어 지금은 절두산 순교기념성당 유해실에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서짓골은 ‘빈 무덤’이라 하지만, 성인들의 시신이 진토 되어 남은 본래의 묘이다. 그곳 4위 성인의 무덤을 표시하는 사성제대(四聖祭臺)를 찾아서 순례자들이 참배한다. 그리고 그 순교성인들의 시신을 모신 탓으로 그곳 서짓골의 신자들이 또한 순교한 사연을 사성제대는 알려주고 있다.

서짓골성지대표사진
서짓골성지대표사진

■ 하부내포성지 소개
충청도 서북 지역의 삽교천 유역은 평야지대인데 그 지역을 고유하게 ‘내포’라 한다. 그런데 당시 교회의 선교사들이 산이 많은 고지대를 포함한 지역을 상부내포, 들녘 저지대를 하부내포라 하였다. 그와 동시에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는 행정 중심지였던 홍주(홍주목 : 현 홍성)를 상급 치소로써 ‘상부내포’지역이라 한 반면, 평야지대(덕산현 등)를 하급 치소로써 ‘하부내포’지역이라 구분하였음즉 하다. 그러던 관습에 따라 홍주의 하급 고을들이었던 아랫녘 보령과 남포, 비인, 서천, 홍산, 임천, 한산 등 금북정맥 남쪽 지역을 ‘하부내포’라 부르던 관행이 생겼던 것이다. 실제로 보령과 서천 지역에는 일명 ‘안개”(내포)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남포만,장구만,비인만 등의 포구 ).
이와 같은 하부내포 지역은 사실상 산악지대이다. 그러므로 금북정맥 북쪽의 삽교천 유역에 비하여 험한 산속의 오지가 많다. 그러한 오지에 점차 교우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 하부내포의 산악지역 오지에 교우들이 피신하여 살던 사연과그 신앙생활의 실상을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도앙골 발 최초의 서한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삽교천 유역의 평야지대(덕산,합덕,당진,아산,서산)에서 금북정맥 이남의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살던 신자들의 모습을 최양업 신부의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도앙골에서 작성하여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주와 신부께 조선에서 올린 최초편지 중 발췌)

삽티성지


삽티성지대표사진 관리 공소 주소 만수리공소
(우33103)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사무실 : 041-836-9625
- 사제관 : 070-4130-9625
- F A X : 041-836-9625
주소 (우33202)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이메일 E-Mail : gabie@catholic.or.kr 성지 미사 안내 연중 주일 오전 11시
※ 평일에는 순례자들 사전 연락에 따라 봉헌
찾아오시는 길 서부여IC→보령방향→만수리공소
※ 만수리공소에서 성지에 대한 별도 안내를 함
근접 도보순례 가능 성지

삽티성지→도앙골성지로의 도보순례 구간이 있다.
(삽티→도앙골 3.5㎞)

성지소개

현 부여군 내산면과 보령시 미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 능선이 동쪽으로 뻗어 흘러 천보산 능선과 맞닿은 고개를 ‘삽티(揷峙)’라 일컫는다. 일명 ‘삽고개’라 하는 ‘삽티’는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면계를 이룬다.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 계곡과 북쪽 계곡에 박해시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로 연통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삽티 능선을 오늘날 남북으로 가로질러 넘는 도로가 ‘삽티로’라 하는 613번 지방도이다. ‘삽고개’에서부터 남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계곡에 옛적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게 되어 그곳을 ‘삽티 교우촌’이라 한다. 그 계곡에서 동쪽으로 천보산을 바라보는 서편 비탈에 그 교우촌이 있었다.
그리고 ‘삽고개’의 서편 능선이 월명산 정상에까지 맞닿아 북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이 금지천을 이루는 지점에 ‘도앙골 교우촌’이 있다. 그 ‘도앙골’의 신자들 집에 숨어서 최양업 신부는 1850년 10월에 자기 활동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삽티 교우촌’과 ‘도앙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1866년 ‘병인대박해’시기에 홍산 관아에 체포되어 일부는 공주 감영에서 일부는 한양(서울)에서 처형 되었다.
‘삽티 교우촌’에서 병인대박해시까지 살던 사람들은 황석두(루카) 성인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성인의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이다. 황석두 성인이 그들을 삽티에 살도록 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게하고 친히 삽티를 찾아 독려하기도 했다. 1866년(병인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에 보령 충청수영의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된 황석두 성인 등 다섯 순교자들의 머리를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마구잡이로 모래밭에 묻었는데, 그 중에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분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에 의해 거두어져서 이곳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황천일과 황기원은 이러한 일로 인하여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 처형되었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홍산 삽티의 ‘즘터’에서는 1964년에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시기의 성물(聖物)이 담긴 옹기가 발견 되었다. 그 ‘즘터’는 금지2리에서 남쪽으로 삽고개를 넘어서 홍산면 상천2리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너머 경사지에 위치한다. 그 경사지는 상천리에서 도앙골(내산면 금지1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의 성화당 고개 아래 계곡과도 만나는데, 그 현장은 2004년에 모 문중의 재실과 묘원이 조성 되었고, 그 북편 윗자락은 개인사업자가 2012년에 절개하여 여러 동(棟)의 양계공장을 건축하였다. 그 ‘즘터’는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석두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차기진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이미 모 문중의 묘원과 양계공장이 들어선 그곳의 서편 윗자락을 2013년 초 매입하여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모 문중의 묘원과 양계공장이 들어선 그곳의 서편 윗자락을 2013년 초에 어렵게 매입하여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다. 도앙골의 신자들은 아마도 삽티의 그 ‘즘터’로 넘어 다니며(성황당 고개를 넘어) 홍산 지역의 다른 곳 신자들과 연통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금지1리의 주민들도 도보로 홍산 읍내 방향에 일보러 다니던 과거사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성물이 들어있는 옹기를 발견한 곳을 ‘즘터’라 일컫는 것은 ‘삽티 교우촌’의 잔류 신자들이 대를 이어 옹기를 구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지로서의 의의와 그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배출한 ‘삽티 교우촌’은 한국천주교회의 주요 순례지로 조성해야 할 역사성을 지닌다.

삽ㅌ성지대표사진

■ 하부내포성지 소개
충청도 서북 지역의 삽교천 유역은 평야지대인데 그 지역을 고유하게 ‘내포’라 한다. 그런데 당시 교회의 선교사들이 산이 많은 고지대를 포함한 지역을 상부내포, 들녘 저지대를 하부내포라 하였다. 그와 동시에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는 행정 중심지였던 홍주(홍주목 : 현 홍성)를 상급 치소로써 ‘상부내포’지역이라 한 반면, 평야지대(덕산현 등)를 하급 치소로써 ‘하부내포’지역이라 구분하였음즉 하다. 그러던 관습에 따라 홍주의 하급 고을들이었던 아랫녘 보령과 남포, 비인, 서천, 홍산, 임천, 한산 등 금북정맥 남쪽 지역을 ‘하부내포’라 부르던 관행이 생겼던 것이다. 실제로 보령과 서천 지역에는 일명 ‘안개”(내포)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남포만,장구만,비인만 등의 포구 ).
이와 같은 하부내포 지역은 사실상 산악지대이다. 그러므로 금북정맥 북쪽의 삽교천 유역에 비하여 험한 산속의 오지가 많다. 그러한 오지에 점차 교우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 하부내포의 산악지역 오지에 교우들이 피신하여 살던 사연과그 신앙생활의 실상을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도앙골 발 최초의 서한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삽교천 유역의 평야지대(덕산,합덕,당진,아산,서산)에서 금북정맥 이남의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살던 신자들의 모습을 최양업 신부의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도앙골에서 작성하여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주와 신부께 조선에서 올린 최초편지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