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1048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7-11-27 1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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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난한 이의 날]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세 가지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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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첫 번째 제안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읍시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5-6.14-17).

묵상합시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밀착하여 온전히 그분을 닮고 그분 부활의 힘을 알며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것(필리 3,10-11 참조)이라는 데에 바탕을 두고, 바오로 사도께서 믿음에 관하여 호소하신 말씀은, ‘신앙 고백’은 하나의 ‘관계’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그분의 복음에 대한 열린 마음, 순종 그리고 식별이 요청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삶에서 이 말씀을 되새기고 스승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지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히브 12,2)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특별히 의미가 있는 한 가지 사실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실 때에(마르 1,14-15 참조), 가난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뒤에(루카 4,16-30 참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애정과 호의를 보여 주시지만, 소외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특별하게 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하느님 나라의 작은 이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성경 계시에 따르는 명백한 편애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천대와 억압을 당하는 백성(신명 26,7 참조)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수많은 권고(시편 82,1-8; 잠언 3,28; 집회 4,1-10; 이사 58,7.9-10 참조)를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며, 연대(連帶)가 신앙의 증거에 중대한 측면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애롭고 선하신 아버지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또 그들을 가장 친한 벗들로 여기시는 것을 보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제자의 삶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기본적으로 선택하신 것들을 우리도 선택함으로써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시는 방식으로 드러났고, 다음 가르침으로 분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으로 하느님의 선택이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큰 배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선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러한 관심이야말로 어떤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지 식별하는 기준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선적 선택을 하시며, 놀라운 인간 구원 방식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 이 선언에서 어리석음, 곧 ‘걸림돌’은 정확하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환대를 우선시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열린 자세 안에서 믿는 이들의 생활 방식이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을 돌볼 때에는,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 많은 육(로마 8,3 참조), 곧 나약하고 비참한 인간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분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정서적 연결이 없는 연대는 단지 무료 제공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한결같이 도와주는 선행은 유익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심에 따라 기꺼이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분이 되신 예수님과 똑같이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배려를 하려면 근본적 선택, 곧 자신의 삶 안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과 맺은 관계 때문에 재촉받는 사랑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2코린 5,21 참조). 사실, 선(善)이 발생하는 것은 단순하고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서이며, 이는 창조의 시작 때부터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시고자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말씀의 강생조차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비롯하여 어려운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시며, 연대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6-17). 나눔은 남아돌든 아니든 어떤 것의 일부를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곧 그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해 주려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고, 그를 소외에서 구해 내고자 몸값을 지불하는 너그러운 선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러한 선택으로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특전을 베푸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우리는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에 토대를 둔,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지정될 정도로(로마 8,16-17.28-29 참조) 매우 각별한 선호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표현은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하느님께 기도하는 전형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선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생존을 위하여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궁핍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의존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입니다.

또 하나의 그리고 훨씬 더 근원적인 태도가 앞의 첫 번째 태도의 뒤를 잇습니다. 그것은 복음 선포의 전통에서 일관성 있게 이어지는 한 가지 행동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반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복음을 선포하다”(euagghelizesthai)라는 동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루카 7,22)는 표현에서 우리는 변두리의 삶에서 발견되는 특권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복음이 지닌 힘의 수호자들입니다(로마 1,16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정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성전입니다. 이곳은 가까이 계시는 당신의 놀라운 빛(1베드 2,9)이 발산되는 거룩한 곳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참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배우는 현장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는 것이 사도들이 보여 주고 물려 준 유산이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의 명확한 훈계, 곧 “들으십시오.”는 보편적 명령의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6)라는 책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훈계를 이행하는 데에 부족함이 컸기에 이러한 말씀을 남기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서간의 저자에게는, 가난한 이에게 부족한 것들, 곧 그날 먹을 양식(야고 2,15 참조)과 몸에 필요한 것(야고 2,16 참조)을 주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계시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간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서 그분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업신여기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atimazein) 사용에서 명백하게 표현됩니다. 이 동사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난한 이들의 궁핍한 삶에 다가가 도움을 주는 행동을 통하여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위대하신 하느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서간 저자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우리는 여기에서 명약관화한 한 측면을 발견합니다. 제자의 믿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threskeia)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는 정도만큼 깨끗하게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배려를 하려면 참으로 중요한 양식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법”에 힘입어 제자는 복음의 자유로써 기꺼이 행동하는 상황, 곧 아무런 편견도 없는 자유의 상태, 아무런 조건 없이 호의로써 연대를 선택하는 자유의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됩니다(야고 1,25 참조). 하느님의 말씀에 참으로 동화되면, 제자들은 명석한 통찰력을 지니게 되고, 예수님을 닮게 되며, 자신의 삶을 내어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행복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널리 퍼뜨리게 됩니다(필리 2,1-5 참조).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구체적인 일들의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조화를 이루는 협력은, 하느님을 위한 제자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스어 ‘에르곤’(érgon)은 복수로 이중의 의미, 곧 가난한 이의 실존을 다시 시작하려는 열망과 자신의 실존을 다시 찾아가려는 용기를 암시하며, 이는 본질적으로 정확히 복음에 따라(마태 10,9, 루카 9,57-62 참조) 살아가는 삶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라는 거듭된 부르심입니다. 연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이들을 당신의 친구로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원칙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합니다. 제자 스스로 더욱 검소한 삶을 지향하지 않고 다른 이의 가난을 나누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관하여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 성인은 자신의 저술(「탐욕에 관하여」[De Avartia], 강론 VI,7)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려고 받은 재화를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아껴 두었습니다. 어떤 이가 다른 이의 옷을 훔치면 우리는 그를 도둑이라 부릅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도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찬장에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장롱에 있는 입지 않은 코트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장롱에서 썩고 있는 신발은 없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도와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불의를 범한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89항의 구절은 이러한 경고를 반복하며, 연대는 공동선에 이르기 위한 본질적 기준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화의 사적 소유는 그 재화를 보호하고 증진하여 공동선에 더 잘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연대는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결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복음적이며 가난한 이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개념화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에(1요한 4,19 참조)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은 재화의 소유에 영향을 미치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은, 아마도 갈라티아서 5장 6절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말씀과 대구를 이룹니다. 이 말씀들은 가난한 이와 맺는 관계에서 검소한 생활방식에 내포된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속한 것, 진실을 말하자면 자신만을 위하여 인색하게 살아가는 비참한 사람들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는 사람만이, 애정을 가난한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들은 사막과 광야에서 헤매며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였다.
주리고 목까지 말라
목숨이 다하여 갔다.

이 곤경 속에서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난관에서 그들을 구해 주셨다.
그들을 옳은 길로 걷게 하시어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게 하셨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을 위한 그 기적들을.
그분께서는 목마른 이에게 물을 먹이시고
배고픈 이를 좋은 것으로 채우셨다.

이 곤경 속에서 그들이 주님께 소리치자
난관에서 그들을 구하셨다.
그들을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셨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을 위한 그 기적들을.
주린 이들을 그곳에 살게 하시니
그들이 사람 사는 성읍을 일으켰다.

밭에 씨 뿌리고 포도원에 나무 심어
소출을 거두어들였다.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들이 크게 늘어나고
그들의 가축들도 줄지 않게 하셨다.

불쌍한 이는 비참에서 들어 올리시고
그 가족들을 양 떼처럼 많게 하셨다.
누가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는가?
이를 마음에 간직하여
주님의 자애를 깨달아라.
(시편 107편 참조)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두 번째 제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

말씀을 들읍시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14-24).

묵상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바로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우리에게 다음 계명을 전해 주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요한은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욱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교부 전승에 따르면 요한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페소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자장가처럼 반복하곤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방식대로 “지어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스승이자 주님께 가장 깊이 충실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님에 대해 요한복음은 아마도 공관 복음서보다 더욱 충실히 전합니다. 그것은 장소, 시간, 인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잘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그 마음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서간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표현으로 신앙의 신비 전체를 종합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얼마나 온전히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 분석에서 요한은 단지 두 가지 덕과 두 가지 죄가 존재한다고 전합니다. 첫째 덕은 예수님을 믿는 것, 두 번째 덕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두 가지 죄는 이것들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성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3장 18절에서도 우리를 “자녀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이를 반복합니다. 요한은 모두를 “자녀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부성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제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준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서간에서 “자녀 여러분”이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노인과 젊은이 모두를 포함합니다. 

나아가 이 복음사가의 부성은, 당신 아드님을 내주시어 그 안에서 모든 이가 자녀가 되도록 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더욱 큰 부성에 의존합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났던 기쁨,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나눔이 없었다면, 그의 기쁨은 충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이라는 표현은 “형제 여러분”이라는 표현으로 보완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부모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통해 자녀를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는 바로 가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형제들은 함께 살면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아플 때뿐 아니라 축하의 순간에 동참하는 법을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두 개의 미덕과 두 개의 죄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모든 참된 관계는 자신의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함축합니다. 또한 형제나 자매에 대한 모든 참된 사랑은 그들을 만드셨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거나 마실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의 존엄을 지켜 주지 않고 교육과 학교를 통해 발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지 않거나 심지어 자신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것은 참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폄하하거나 섬기지 않는 이는 누구나 결국 하느님을 창조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피조물을 폄하하는 사람은 또한 그 피조물을 원하시는 창조주를 폄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인 인간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우리는 그가 지상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가 기쁘게 생활하고 하느님을 발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에피쿠로스(Epicurus)의 큰 실수였습니다. 실제로,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죽음이 아닌 상대방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친구, 형제, 사랑하는 이, 그리고 가난한 이가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이 “말”을 “행동과 진리”와 대조시킨 것은 복음 선포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삶에 반영되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기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신에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과 말이,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 하느님의 자녀, 존엄과 선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그러한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그러한 개인적 만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신랑신부부터 사마리아 여인까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부터 나자로까지, ‘양 문’ 곁 못 가에 있는 사람부터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던 요한 자신까지 예수님께서는 늘 멈춰 서시어 모든 남자와 여자, 곧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이를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바로 이러한 인격적 관심, 이러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만남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난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해석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과 그분 제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한 인간은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을 뛰어넘어 중요합니다. 어느 모로도 건강을 회복하리라 기대할 수 없는 죽어 가는 이는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형제입니다. 가난한 이의 날은 이러한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같은 식탁에 머물러 이 세상의 빵과 천상의 빵을 나누게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충분합니까? 세상을 들어 올릴 만큼 사랑이 충분합니까? 오늘날 역사, 민족, 경제, 정치, 공공 기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변화와 회생의 사회 발전에 저해되는 수많은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할 만큼 충분합니까? 일시적 효능에 대한 현대의 신화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사랑은 환상이 아니며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합니까?”  

“우리는 “예.”와 “아니오.” 둘 다 대답하여야 합니다. “예.” 사랑은 우리가 사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위대한 혁신적 현상 뒤에 있는 원동력으로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것입니다. “아니오.” 사랑이 순전히 이론, 말과 감정의 문제로 머물러 있다면(마태 7,21 참조), 다른 미덕, 무엇보다 사랑의 최소한의 척도인 정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 그 자체로 감화되고 지속되는 행동을 현세의 인간사의 구체적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실천하고 구체화하는 다른 미덕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은 충분하지 않습니다”(“발전의 날”을 위해 보고타 사도 순례에서 한 바오로 6세 교황 강론, 1968년 8월 23일).
 

“그러나 분명히 모두가 지식 탐구에 힘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두가 알 수 있으며, 무지로 인해 지키지 못하는 이가 없는 요약한 법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법입니다. … 사랑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다른 미덕이 아닌 오로지 사랑에서의 차이가 참행복에서 차이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보다 더 금욕적이었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탁월한 사랑 때문에 참행복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앞섭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십계명」[Ten Commandments], 서문).

“사랑은 믿음을 살아 있도록 하는 믿음의 영혼입니다. 사랑 없이는 믿음은 사라집니다”(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과 주일 설교집」 제2권[Sermones Dominicales et Festivi II]).  

“순교에 대한 저의 열망이 강력하고 불안정하기에 저는 궁극적 해답을 찾고자 하는 희망으로 바오로 성인의 서간에 의지하였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12장과 13장이 우연히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저는 모두가 사도  또는 예언자나 교사가 될 수 없고,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손이 될 수 없다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제 앞에 밝혀진 그와 같은 해답에도 저는 만족할 수 없었으며 평화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읽고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주제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보다 큰 은사는 없으며 이와 같은 사랑이 확실히 하느님께로 직접 이끄는 최상의 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신비체인 교회를 바라보면서 저는 제가 바오로 성인이 설명한 지체 가운데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제 자신이 그 몸 전체에서 돋보이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저에게 사랑은 제 소명의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다양한 지체로 구성된 한 몸이지만 이 몸에는 필수적이고 더욱 고귀한 지체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가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심장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의 사랑이 교회의 구성원들을 행동하도록 이끌며, 이러한 사랑이 꺼진다면, 사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순교자들도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사랑이 모든 소명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사랑은 모든 것이고, 이와 같은 사랑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를 끌어안는다는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제 영혼은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지극한 기쁨으로 선포합니다. 오 나의 사랑 예수님, 마침내 저는 저의 소명을 찾았습니다. 저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확실히 저는 교회에서 저의 자리를 찾았고, 하느님 당신께서 바로 그 자리를 주셨습니다. 제 열망이 방향을 찾았으므로, 저는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사랑이 될 것이며 그래서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세 번째 제안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

말씀을 들읍시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이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그분 이름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네.

주님의 천사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출해 준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34[33])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마태 27,27-50).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이상 옷 벗기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곧, 먼저 신문을 받는 동안 총독 관저에서 군사들에 의해, 그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옷 벗기심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처럼 알몸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기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탁월하게 가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그리스도인 가난의 모범으로 여겼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셨습니다(필리 2,7).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 주셨던 것처럼 가장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시는 이러한 태도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겸허하고 성실하게, 역사의 왕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의 의미는 가난하고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기신 무죄하신 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타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강생하시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신 것은 그분의 완전한 가난의 표현이며, 부활의 날에 새 생명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힘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선적 선택의 계시적 완성을 나타냅니다. 성자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과 가장 비천한 이들의 연대의 정점을 보여 준다면, 부활은 분명 성부께서 성자의 봉헌과 무조건적 순종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자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께 희생과 순종을 바치신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가난한 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길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참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가 부유해지도록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그분의 가난한 육신에 감춰진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에 대해 인간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그분은 비록 부유하셨지만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 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어 죽음을 이기셨을 때에 몸소 가난을 보여 주셨으나 우리에게 부요를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부요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껴 두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위해 아껴 두시고, 당신께 희망을 둔 이들에게 당신께서 보여 주신 선하심의 축복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득 주실 때까지 우리는 그 축복에 대하여 아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을 우리가 받도록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종의 조건을 취하시어 우리와 같이 되셨으며 그래서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시어 많은 이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종의 모습으로 드러내시어 종들을 가르치셨고 그리하여 지금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설교집」[Sermo], 194, 3-4). 
 

예수님께서는 몸소, 모순적이지만 가난하게 되시어 가난한 이와 연대하시고,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을 믿는 모든 이가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 곁에 머물러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가난과 헐벗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우선적 선택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 상(像)과 인간상(像)을 재정립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 편에 서시게 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는 알리바이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려면, 특히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성자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길은 잘 알려져 있고 …… 그 기초는 두 개의 축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0.19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 이처럼 우리는 성삼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비의 감도를 받아, 가난한 우리 형제자매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자비의 활동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예수님의 가난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가장 일관된 충실함을 보여 줍니다. 이 가난은, 최후에 이르기까지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종, 인류 구원을 위한 성자의 봉헌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종이 됩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께서 이루신 이러한 자기 비움의 여정을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높은 “자리”인 전례에서 관상합니다. 이때 그리스도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인간으로서 가난의 극치에 이르시기까지, 아버지 당신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을 계시하셨나이다”(「혼인 예식」, 혼인 축복 4). 그러나 또한 십자가 위에서 메시아의 부르짖음은, 제자가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의 연대의 원천을 이해하는 길인 계시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연대는 하느님 부성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경험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러한 하느님 부성의 경험은 사람들 사이의 차별에게 벗어나도록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어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 방식의 가난과 가난한 이를 위한 복음은 복음의 심장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뛰고 있는 박동이 됩니다. 이 두 박동은 스승께서 선택하신 삶의 방식을 표현하며, 그분의 제자들이 완전하고 충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준거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무엇보다 제자들이 실천하도록 부름받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름받은 가난은 예수님께서 말씀, 선택, 행동으로 보여 주셨던, 하느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새로운 길을 보여 줍니다. 역사 안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촉구된 것은 바로, 삶의 변화와 소유물과 또한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가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의 시작이며 토대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4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가난을 ‘가난한 예수님을 따르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이는 그분을 따라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늘 나라의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 가난은, 우리 피조물의 한계와 죄악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전능하고 불멸하는 존재로 느끼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은 돈과 경력과 사치를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데서 벗어나게 해 주는 내적 자세입니다. 오히려 가난은 ……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이미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분명히, 믿음을 지닌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론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다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가 없을 것이다”(15,4). 사도행전의 다음 말씀은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4,31-35). 이 성경 말씀에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기도, 성령의 현존,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이 선행되었기에 재산의 공유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와 같은 공유와 이와 같은 본질적 생활 방식의 힘은 참으로, 부활하시어 공동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너무나 강력하고 결정적이어서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제자들의 신앙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어 필요한 방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공유하고 궁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사도 4,34 참조).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살아 계시는 분(묵시 1,18 참조)과의 만남의 샘에서 바로, “모든 시대와 교회 상황에서 가난한 이를 가까이로 다가가,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그들을 감싸 안으며, 그들을 위한 봉사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마치 양심 성찰, 그리고 그리스도 공동체와 함께 자신의 신앙의 길을 입증하는 기준처럼 이것을 확인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럼으로써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위한 행동은 단순히 갈망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믿는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구체적 태도와 길이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믿는 이들은, 교회의 시초부터 가난한 이에 대해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진 오랜 길을 계속해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시편 34[33],7).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으신 아드님의 십자가상 부르짖음을 들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열려 있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통해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계속해서 듣고 계십니다.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을 환대하며 돌보아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이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르짖었는데도 듣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 불행의 부르짖음을 소리쳐 외치면 주님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여러분이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는 분을 소유할 때까지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시편 상해」[Exposition on the Psalms] 33/2,11).

기도합시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저의 세월 연기처럼 스러져 가고
저의 뼈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나이다.
 
제 마음 베어 놓은 풀처럼 메말라 가고
음식을 먹는 것도 잊었나이다.
저의 깊은 탄식 소리에
제 뼈에 살가죽이 붙었나이다.
저는 광야의 까마귀처럼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나이다.
 
저는 잠 못 이루고
지붕 위 외로운 새처럼 되었나이다.
원수들은 온종일 저를 모욕하고
미친 듯 날뛰는 자들 저를 저주하나이다.
저는 빵 먹듯 재를 먹고
마실 것에 제 눈물을 섞으니
당신이 분노와 진노로
저를 내던지신 까닭이옵니다.
 
저의 세월 기우는 그림자 같고
저는 풀처럼 메말라 가나이다.
주님, 당신은 영원히 다스리시니
대대로 당신을 기억하나이다.
당신은 일어나 시온을 가엾이 여기시리이다.
시온에 자비를 베푸실 때가,
정하신 그 때가 다가왔나이다.

당신 종들이 시온의 돌을 소중히 여기고
그 흙을 가엾이 여기나이다.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시온에서 주님의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
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시편 102[10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루카 1,46-51)   

자비하시고 성실하신 하느님 아버지,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보내 주셨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소한 이와 가난한 이
연약한 이와 죄인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푸시고
억눌린 이와 고통 받는 이의 이웃이 되셨으며
주님께서 모든 자녀를 자상히 돌보시는 아버지이심을
말씀과 행동으로 세상에 알리셨나이다.
(기원 미사 감사 기도, 감사송 4)

예수님은 누구시옵니까,
강생하신 말씀. 생명의 빵.
저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
저와 세상의 죄 대신
봉헌되신 거룩한 제사 예물.
전해야 할 말씀.
선포해야 할 진리.
따라야 할 길.
밝혀야 할 빛.
실천해야 할 삶.
사랑받아야 할 사랑.

함께 나눠야 할 기쁨.
봉헌해야 할 희생제사.
전해야 할 평화.
먹어야 할 생명의 빵.
먹여야 할 굶주린 이.
축여야 할 목마른 이.
입혀야 할 헐벗은 이.
맞아들여야 할 집 없는 이.
동행해야 할 외로운 이.
환대해야 할 불청객.
씻겨 줘야 할 한센인.
미소로 반겨야 할 걸인.
귀 기울여야 할 술 취한 이.
보호해야 할 지적 장애인.
감싸 안아야 할 미소한 이.
인도해야 할 눈먼 이.
입이 되어주어야 할 말 못하는 이.
동행해 주어야 할 다리 저는 이.
위험에서 구하고 친구 되어 주어야 할 창녀.
찾아가야 할 죄수.
돌봐 주어야 할 노인.
예수님은 저의 하느님.
예수님은 저의 배필.
예수님은 저의 생명.
예수님은 저의 유일한 사랑.
예수님은 저의 모든 것.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