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교구장

원형근(아드리아노) 주교

취임기간 1948~1963

1883년 프랑스 오쉬(Auch) 교구의 라 로미외(La Romieu)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907년 3월 10일에 사제품을 받고 한국으로 파견되어 5월 21일 입국하였다. 그는 몇 달간의 언어 공부를 마친 후 그해 9월 원산으로 파견되어 브레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왔고, 1909년 5월에는 만주 간도의 삼원봉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징집되어 사제가 부족해지자 라리보 신부는 충청도로 파견되어 합덕과 서산 두 본당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1917년 4월 라리보 신부는 서울대목구 당가(當家, 관리국장)로 임명되어 서울에 거주하며 교구 재정을 맡았다. 그는 1926년 12월 14일 서울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1927년 5월 1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교구장 뮈텔 주교는 73세의 연로한 나이여서 사제서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한을 부주교에게 위임하였기에 라리보 주교는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교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3년 1월 뮈텔 주교가 선종하자 라리보 주교는 ‘제9대 서울대목구장’이 되어 교구를 이끌어나갔다.

그가 서울대목구장이던 기간은 일제강점기이기에 교구를 이끌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지막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교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42년 일본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조선에 외국인 주교가 교구장직을 수행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일본인 주교로 교체하기로 획책하였다. 이를 알게 된 라리보 주교는 서둘러 한국인 노기남 주교를 서울대목구장에 임명한 후, 1942년 1월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사임 후에도 선교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용산본당 초대 주임이 되어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해방이 된 후 라리보 주교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다시 한 번 교구장이 되었다. 1948년 5월 8일 충청남도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새 교구, 즉 대전교구가 설정되면서 라리보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65세의 고령에 교구장에 취임하여 2년이 되지 않았을 때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교구 설정 초기에 14개 본당, 19명의 성직자와 18,000여명의 신자수로 시작한 대전교구의 활기찬 출발도 잠시, 전쟁 중에 10명의 성직자를 잃는 아픔도 겪게 된다. 이런 교계 내외와 민족적 상처를 보듬기 위해 라리보 주교는 ‘성모병원’을 세우고, ‘학교법인 대지학원’을 설립하여 지역민의 계몽과 전인적 치료를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하며 어려움 속에서 대전교구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또한 1962년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새로운 물결을 접해야했다. 이에 라리보 주교는 새 시대에 맞는 새 교구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963년 대전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사임 후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휴양소가 있는 몽브통(Montbeton)에서 지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였으나 연로한 나이에 폐가 될까하여 몽브통 휴양소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4년 8월 12일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살아생전에 라리보 주교는 한국에서의 오랜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 11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96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수여하는 문화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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