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54674
  • 글쓴이 : 강명수
  • 작성일 : 2018/07/24
  • 조회수 : 436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방랑속 종교

저자 후자와라 신야는 20대에 인도,티벳 방랑을 통해 현대문명에서 벗어난

인도티벳트에서의 정신적 공감을 체험한 글로 당시 일본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30대 중반에 동양과 서양의 중간지대에 있는 터키 이스탐불을 시작으로

중동지역 레바논.시리아를 지나 이란과 파키스탄의 고원지대를 넘어

인도 캘커터로 들어갔다.

이어 미얀마와 태국을 거쳐 중국홍콩과 한국의 서울을 거쳐 모국인

일본까지 장장 1년 이상의 유랑을 하였다.

그는 인간이 가장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바닥으로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밀착하며 그 사회에 가지고 있는 종교와 삶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 했다.

 

그는 이 긴 여행에서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고 멍청한 인간이든 고귀한 인간이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했다고 한다.

얼어붙은 그의 여행이 녹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체온이었고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역시 그가 만나 사귄 인간이라고 확연히 말한다.

종교와 인종의 편견 없이 인간을 원초적으로 접하며 상대한 그의 여행기를 간추려본다.

...

 

그가 접했던 층들은 빈민의 수렁에서부터 원초적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치는

유곽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그는 터키에서 조악한 갱지를 엮은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15센티미터쯤 되는 소책자 표지에서

여자의 바스트업 사진을 발견하고 이 여자의 행방을 찾으러 앙카라의 뒷 골목을 헤메고 수색한 적이 있다.

술집의 어느 곳에서 그 여자는 트랜스젠더출신으로서 어느 섬에 팔려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서 그녀가 바다로 뛰어 내려가 지중해 밑바닥에 있을 거라고 기묘하게 불균형한

결말을 내주었다.

저자는 무섭도록 불쾌한 기분으로 공허한 그 장소에서 빠져나와 아타튀르크 거리를 걸어갔다.

..

저자는 흑해가 보고 싶었다.

아나톨니아 대륙일대를 어슬렁거리다가 보스푸루스 해협을 빠져나가 바다에 도달했다.

검은 수평선이 함시라는 작은 생선의 등 빛깔과 비슷하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전보를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흑해의 물은 검다고..

 

그는 얼마 안가 규사의 대지로 들어갔다.

영원한 일직선이 있는 길 저편은 은회색이 갈색 황토로 변했다.

참으로 광대하다는 불모의 확장 외에 표현할 길이 없는 광막 속의 점경들.

저자는 문득 이슬람세계의 확장을 생각했다.

서아시아에서의 광물적 세계인 이슬람은 동아시아 식물적 세계인 힌두,불교의

세계와 다

 

르며 서로 대립양상을 띠운다.

그러나 서로 동일한 종교행사인 단식 같은 것은 이슬람교는 라마단을 통해

광물적세계의 가혹한 환경을 견뎌내기 위한 육체의 단련인 것에 비해

동아시아에서의 단식은 식물적 세계의 풍요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정신의 단련이라

여겨진다.

중동지방 시리아의 라카에 도착하며 저자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들의 시선에 증오와 분노를 보았다.

그것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옥타브다.

이곳에서는 증오로 증오를 제압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불교의 미소종교와 보신술은 통하지 않는다.

싸구려 호텔방에는 사막 냄새베개 에서 산양 기름 냄새가 났다.

이슬람교도가 베었던 베개다.

분노의 색조가 있는 산양의 울음소리와 같은 코란의 낭송을 들으며 비극적인 색조와 애수의 그늘을 느낀다.

 

다른 남근을 제압하기 위한 격렬한 노기가 깃든 단순함이 있는 산양에게는

산양의 코란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이 코란이 있다고 정의한다.

...

 

저자는 동물성 유지와 광물의 신성한 산성체질산성종교의 나라에서,산양의 나라에서,

식물성 유지와 알칼리 종교가 있는 국토로,

소의 나라인 갈색황토 언덕 파키스탄을 넘어 인도로 들어간다.

 

캘거타의 우기가 잠깐 멈출 때는 온도와 습도가 계속 올라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밀폐상태인 실내의 밤에도 40도 이상 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조에 들어가서 잠을 청한다.

그러나 단 몇 시간이 지나면 악몽에 시달린다.

몸이 물을 거부하는 경고이고 그 때쯤이면 구토증과 물이 보기도 싫어진다.

손발이 불어터진 찐빵처럼 새하얗다.

비가 들어 닥치면 30분만의 폭우에 세균배양기 같은 하수도가 넘친다.

비릿하고 음울한 냄새가 나는 비온 뒤의 캘커타의 허스름한 옥상에서

유곽의 20대 후반의 한 여성에게 여기에 팔려온 이야기를 듣는다.

암소가 없는 가난한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예쁜 암소를 사려고 자신을 팔았단다.

택시를 타고 포주와 함께 출발하려는데 풀 죽은 창밖의 남동생이 돌을 던져

택시의 유리에 금을 가게 하였다.

빡빡머리 포주는 변상금으로 택시비를 제하고 돈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두운 남쪽 하늘에 시커먼 먹장구름이 나타나더니 빠르게 지나가며

비가 내린다.

여자와 저자는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말없이 그 도시를 바라보았다.

 

....

 

히말라야의 맑은 공기,심해 처럼 검푸른 하늘을 보며 라마교 사원으로 들어섰다.

라다크 지방에서 스님들은 평생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행 정진하는 것으로 지낸다.

이 곳의 스님들은 매일 동네 속인들을 만나니 속인을 벗어나가는 힘들어 보인다고

느꼈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천하게 여기기에 할 말이 있으면 발치에서 돌을 맞부딪치며

알려주면 서로 다가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

수행을 하던 스님 중 속세로 다시 도망가는 이도 꽤 있다 한다.

그중에서 주로 사십대 초반의 승려들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미혹이 없는 평안으로 가는 건지다시는 절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알면서 돌아간다.

저자는 20 여일 만에 산사를 떠난다는 그를 바라보는 노승의 눈동자를 찍고 싶어

사진에 담았다.

 

이스탐불에서는 혹한의 겨울이었지만 중동을 거쳐 버마에 이르니 한 여름이었다.

시리아의 사막에서 연 노란색 풀을 보며 식욕과 성욕을 느끼는 등 장기여행자는

이런 계절의 변화로 활력을 받는다.

히말라야 산속에서 20여일 간 보릿겨만 먹는 단식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미얀마에서는 숨 막히도록 짙은 녹색을 보았다.

저자는 동양의 식물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다른 서아시아의 광물세계와

훨씬 더 극적인 것을 보았다.

이 엄청난 풍토의 원질 차이는신의 어떠한 의지마저 개입된 하나의 대위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풍토의 대위법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감의 대위법으로 이어지면서,

종교로 말한다면 광물세계 이슬람교와 식물세계 불교의 대립으로 되는 것이다.

 

이슬람인의 표정은 핏발선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분노상 같았다.

그 것은 거대한 집체를 이루면서도 한 알 한 알 메마르고 고립된 사막의 모래처럼

냉철하고 결코 애매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사람들은 식물의 느긋한 생명의 리듬이 스며들었는지 전형적 농경민의 리듬이었다.

상냥하고 의젓하고 마치 미모사처럼 살아가는 이 불교 국 사람들은 그들의 등 뒤에

부처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저자는 같은 불교 국 나라로 넘어간 태국에서 미풍에 섞여 있는 냄새를 확인해보니

마치 금목서 향기 같았다.

그 곳에서 유곽근처에 이르며 미친 여자 한명을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은 늙은 여자의 얼굴로 덕지덕지 분을 바르고 볼연지를 바르고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무슨 연유인지 스님스님하며 따뜻하게 불렀다.

치앙마이의 저녁놀은 놀랍도록 찰나적으로그 강렬한 광채는 시간을 수축시키고

색채를 압축시켜 한순간에 절정에 도달한 후 사라졌다.

개골창 냄새가 나는 유곽의 싸구려 방에 짐을 푸니그곳에 있든 사내 가 당신도 어지간히

가난뱅이로 여자 살돈이 없어 이런 더러운 곳에서 자다니 하고 말했다.

 

후지와라는 개골창 수면이 자체 발광하는 것처럼 옅은 빛을 머금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늪지 사이에서 연분홍 꽃봉오리가 밤하늘을 찌를듯히 솟아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연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그것은 어둠속에 버려진 부모 없는 영아의 모습 같았다.

 

--

 

중국으로 넘어가 상하이로 들어가며  사람들의 눈이 상당히 냉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카메라에 눈독을 들이는 바로 저 눈빛은 물건에 대한 의식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중국인의 피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저자는 중국보다 훨씬 더 가난한 나라로 여행을 하였지만 그들은 물질보다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것은 정신성을 따지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저 빈곤한 인도에서 힌두교가 생긴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 성당에 들어갔지만 십자가도 사교좌도 없었다.

물질이 지배하는 중국은 물질이 신이었다.

저자는 홍콩으로 넘어가 잔득 부풀린 돼지 방광을 튜브로 삼고 본토바다를 건너온 형제들을

만났다.

이 형제들은 마약 브로커를 하며 먹고 살지만 지금은 고향에 소식도 전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런 이들이 14년 전에 큰 부자가 되기 위한 꿈을 안고서홍콩 쪽 여명을 보며 헤엄쳐 온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한반도 한국으로 넘어와서 뱀탕집과 돼지머리 집에서 간을 먹으며,

외로우면 그곳으로 가시라는

청량리 588을 소개한 시장아줌마의 농담에 따라 유곽에 갔다.

그 음습한 골목길에서 곰치할멈이라는  늙은 여자에게 린치를 당하는등 억센 팔에

이끌려 쪽방으로 끌려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가 낮에 택시를 타고 오며 들었던 오열 하는듯한 격렬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단순한 흐느낌이 아닌 분노가 미묘하게 겹쳐진 소리 그리고 그 선율을 타고 오는 것이 문득 꿀처럼 느껴지는 판소리를 처음 들었다.

유곽의 허름한 옆방에서 서른 도 넘지 않은 창녀 한명이 하복부를 쥐어 잡고 신음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월경이던지 뜨뜻한 그 액체가 혹 세상에 나오기 전 버려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그 죄의식을 이 서른 즈음의 여자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속죄하고 있는 거라면 아직 이 여자는 한 줌의 행복이나 희망 같은 것을 몸속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옆방의 여자의 검은 눈을 보며 말로 풀어내지 못한 판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홍콩과 중국이 물질적 에테르라면 한반도는 작은 미소가 부활하는 곳이었다.

 

미얀마나 태국같이 불교적 염화미소 라기 보다 유교적 박애에서 나오는 미소인 것 같았다.

한국인은 정이 깊고 피가 진하다.

그것은 때로는 격렬한 슬픔과 분노의 기풍을 드러낸다.

그러나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 국민은 비지땀을 흘려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무섭도록 냉철한 공업은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온화한 마음씨를 가졌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쥐어 짜는듯한 이 굵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판소리는 감미로운 그들의 분노와 슬픔의 노래였다.

..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백치국가이다.

마침내  일본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여행은 곧 사상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것이 어느 위치에 있나 짚어보았다.

저자는 여행지의 음식과 사내들과 아가씨들과 어울렸다.

자신은 길을 걷는자보고 하는자에 불과했지만 아시아의 도시와 사람들의

냄새에 취했었다.

일본은 불교국가이지만 승려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서서히 썩어가는 연꽃 열매 같은 땅이었다.

후지와라는 고야산 분지에 있는 음과 양의 역업이 동서로 나뉘어 맞버티고 있는

형세의 쇼조신인 이라는 절로 들어갔다.

 

여행의 끝이 피안과 차안의 국경선 위에 걸쳐진 방에서 생뚱맞게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그것을 키자 캄캄한 유곡의 정적 속으로 퍼져 나가는듯한 음량이 증폭되며

젊고 세련된 여자들이 만담을 하며 떠들고 있었다.

어떤 사상의 이면이 순간적으로 꿰뚫어 보였는지 그 것이 서구 자본주의의 물질 소비의 겉면만 핥으면 살아온 결과라는 것을 느껴졌다.

 

인도처럼 풍족하든 가난 하든 햇빛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만 있어도 자족하는

감정의 사치를 알고 있는 나라는 서양의 가치체계를 배척하고 있다.

미얀마나 태국 같은 불교국가 국민들은 서양인들이 말하는 불교적 뿌리인 방임주의 적인지는 모르지만,

생활의 향상을 위해 살생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광물세계의 동양과 식물세계의 동양이 그 원질을 달리 하는 것처럼

미얀마의 정신적 세계와 태국이동의 물질적세계의 원질이 새로운 양상으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일본적인 에테르로 태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본필리핀등에 서 보여 진 노인에 대한 혐오다.

이것은 종교라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가치를 

축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서양식 물질 소비문명의 가치체계가 인도와 이슬람 까지 촉수를 뻗칠까 혹은

그들의 굴강한 에테르가 물질적 에테르를 소탕할

수 있을까 는 두고 보야 할 것이다.

 

 

종교라는 생존의 도덕률과 올바른 자아의식을 부여해주는 것이 일본에서는 희박하다.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도 처럼 이념적이지 않고 

체질이 동 아시아적으로

일종의 불교적이고 정서적이며 감각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추상적 환경에서는 그 불교적 지혜마저 떠받쳐줄 

기반이 없다.

일본은 종교라는 이념이나 주의가 없이감각과 감성을 칭송하며 균형이 맞지 않은 징후를 보이고 있다.

 

저자는 공항 화장실문 바로 옆 빈 공간 에서 난간에 강화유리가 번쩍이는 인공적 환경에서도 그 것을 환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을 향해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의식을 내던지는 이슬람인들을 보았다.

몰론 그들은 사막에서 보았던  분노의 날카로운 빛을 가진 눈이었다.

이슬람교도는 인간에게 욕망에 대한 갈증대신 금욕과 기도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

후지와라는 일본인인 자신과 일본인들은 저들과 같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체질 속에 남아있는 지혜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과거의 신을 대신 할 신은 무엇일까?

과연 정서와 감각의 인간에서 이념의 인간으로 개종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에게 그 질문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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