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53973
  • 글쓴이 : 강명수
  • 작성일 : 2018/01/27
  • 조회수 : 603

나가이 다카시 바오로.



<나가사키의 노래>  ㅡ책 속의 여행지ㅡ

[ 작품 소개 ]   -저자 폴 그린.

  이 책의 주인공인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 1908~1951)
바오로는 1908년 마쓰에 시에서 태어나 1932년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학교에 남아 
방사선  연구교수가 되었다.

 이후 헌신적인 방사선 연구로 인한 방사선 과다흡수
때문에 백혈병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1945년 8월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 역시 중상을 입고 만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박애정신으로 
이재민들을 돌봤으며, 우라카미(浦上) 성당 복원, 
나가사키 시의 복구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결국
1951년 세상을 떠났지만,『로사리오의 기도』를 
비롯해『이 아이들을 남겨 두고』등을 집필하여 
글로 남기며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나가사키 시에서는 나가이 다카시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나가사키 평화상’을 제정해 방사선 피해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나가이 다카시의 사랑을 찾아서>

 일본 나가사키는 서울에서 1시간 조금 남짓 걸리기에
마치 한국 땅 같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순교자 성지순례와 더불어 나가이 다가시 바오로의
숨결을 느끼고 엔도 슈사쿠의 소설『침묵』의 
배경지를  찾아가는 소위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러(?) 가는 것이 바로 나가사키 순례여행의 
목적이었다.

  이곳은 500년 전 하비에르 신부가 처음 선교를
시작한 이래, 그야말로 피의 순교로 점철되는 박해의 
시대를 겪은 곳으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도시이다. 

나가사키 역 근처에는 니시사카의 26인 성인유적지와 
100주년 서품기념 성당이 위치해 있다. 

특히  성당을 설계한 스페인 건축가가 400년 전 
교토에서 그곳까지 걸어왔던 순교자들처럼, 직접 
그 길을 걸으며 기도 끝에 완성시킨 성당이라는 
눈길을 끄는 일화가 간직된 장소이기도 하다. 

기나긴 그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도자기와 그릇 등을 재료로 사용해 마치 가우디 형
건축 형태처럼 높게 올린 두 탑이 이채로웠다.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순교한 멕시코 성인이기에
멕시코가 재정을 지원하여 건축한 성당으로, 필립보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26인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모셨다. 
성당 옆 26성인 기념관에는 성지순례를 온 한국 
순례객들로 붐비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카톨릭이 
만개한 것을 실감하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200년 먼저 선교의 씨앗이 뿌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카톨릭이 그리 넓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가이 다카시 바오로나 엔도 슈사쿠와 같은
훌륭한 카톨릭 작가가 나오는 것을 보면 질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고, 이 땅에서의 선교가 
언젠가는 그 결실을 더욱 알차게 맺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과 함께 오우라 성당, 콜베 신부 기념관 등을 순례하는 것이 첫 번째 코스이다.

  두 번째 코스는 여기당(如己堂)과 우라카미 성당이다.

  원폭 섬광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회색의 잿가루로 변해버린 아내의 유해 옆에 놓인 묵주를 들고 오히려 봉사와 치유의 길을 선택한 나가이 다카시가 살았던 1평 남짓한 여기당은 그리스도의 삶을 복제한 듯한 그의 거룩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장소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나가사키의 종이 원폭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우라카미 성당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수백 년 전 순교자처럼 불꽃같은 박애의 삶을 산 나가이 다카시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가 일본의 로마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런 순교의 역사가 과거 500년 전부터 불과 50년 전 근대까지 계속 이어지며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후에 시내를 도는 트랩을 타고 26인 순교자 성당, 박물관 등을 돌고 우라카미 성당으로 갔다. 

우라카미 지역은 400여 년 전 포르투갈에서 포교를 한 이래로 초창기 카톨릭 신자들의 본거지였으며 이후 지금까지 이 지역은 일본 카톨릭의 성지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원폭 낙하지점과 불과 5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사실상 직격탄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당시 이 성당 안에서만 사제를 포함해 수십 명이
사망했고, 나가사키 시에 거주하는 가톨릭신자 8,000명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 도시 인근에서 수많은 순교자의 수난이 점철된 나가사키라는 도시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가장 큰 비극의 대상지가 된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일본의 군국주의가 자초한 일이라지만 핵폭탄에 의한 재앙, 특히 원폭 투하 당시를 이 책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다음과 묘사하였다.

  “굉음이 들렸고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B29 한 대가 구름을 뚫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거대한 검은 폭탄을 토해내는 순간 갑자기 무시무시한 빛이 번쩍이더니 온 천지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퍼지면서 하늘로 솟는 거대한 연기 기둥이 보이고 집이며 건물, 나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불도저에 밀리듯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후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소나무 밤나무 등이 뿌리 채 뽑히거나 굵은 줄기가 뚝뚝 부러져나갔고 인근에는 풀 한 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치 성냥곽처럼 돌담 옆에 날려
나가떨어졌다. 

사람들은 몸뚱이가 번질번질 하고 가지색 같은 자주빛을 띤 머리털은 붉은 갈색으로 지져지고 벌거벗은 피투성이의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 24만 명 중 15만이 사망했고, 11시2분인 채로 시간이 정지된 시계, 변형된 유리병 등이 그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전시되어 있는 나가사키 원폭자료실은 1,300점의 자료가 있어 당시의 참혹함과 처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곳 원폭자료관에는 외지에서 온 중학생 수학여행단과 일부 중국인 관광객들도 꽤 있어 한산한 장소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원폭 낙하지점 인근의 원폭자료관에 들어가 소위 ‘뚱보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원자폭탄 모형 앞에 발을 멈추었다.

  당시 미국의 척 스위니 소령은 ‘뚱보사나이’라고 불리는 4.5톤짜리 원자폭탄을 싣고 극도로 위험한 이륙을 시도했으며 목표지점인 고쿠라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나 보조 가솔린 파이프가 공교롭게 막히는 이상이 발견되어, 곧바로 투하하지 않으면 그들 모두 공중에서 폭발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는 할 수 없이 제2 목표지점인 나가사키 도심 지역으로 기수를 돌렸고, 구름이 살짝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했다. 

원래의 원폭 투하 예상 지점에서 3킬로미터 북서쪽이었지만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뚱보사나이가 인구 20만 명의 도시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던 시각은 정각 11시였다.

  책에서는 또한 핵폭탄의 파괴력에 대해 비디오 테이프를 마치 글로 정교하게 복사한 것처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원자폭탄은 재래식 다이너마이트 2만2천 톤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니지만 그 차이는 더욱 엄청나 폭발할 때 섭씨 몇 백만 도에 이르는 강한 열이 방출되면서 핵분열 물질의 이온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때 발생하는 불덩어리로 인해 주변 공기가 빛을 발하는 한편 이 불덩어리가 자외선과 유사한 광선과 적외선을 방출하여 폭심지에서 1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는 즉시 심한 화상을 입고 주변의 건물 지붕들은 모두 녹아 버린다.

 이때 폭심지에서 불어오는 풍속은 초속 2킬로미터로 열대성 저기압이 일으키는 토네이도 속도의 60배에 달하고, 이것이 폭심지를 진공상태로 만들면서 또 다른 역풍을 몰아오는 원인이 되며 이때 먼지, 흙, 파편, 연기 같은 것이 날아드는데 이 때문에 비틀리면서 하늘로 솟구치는 버섯구름이 검은 색을 띠게 된다. 

하얀 구름이 마치 불가사의한 마술에 의해 저절로 살이 찌는 기괴한 생명체처럼 점점 커지면서 겉으론 하얗게 보이지만 안에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빨갛게 타오른다.

그리고 나서 붉은 빛, 노란빛, 자줏빛 섬광이 번갈아 번득이고 구름은 서서히 버섯 모양을 이루며 그 줄기에서 검은 점이 하나 생겨난다. 

마침내 구름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고 마치 위장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게걸스럽게 먹어버린 흉측한 벌레처럼 산산조각이 난다. 

태양은 여전히 비추고 있었지만 구름아래 지역은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이어서 성난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두 번째 충격이 찾아온다.”

  원폭자료관에 들어온 학생들과 중국관광객들은 이 가공할 원폭 폭파 당시의 상황을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가 리뷰되는 것을 몇 번이나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자료관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여기당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여기당은 방사선 학문 탐구로 이미 피폭이 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마지막 몇 년간 집필하려고 임시로 만든 조그마한 방이다.

  이곳은 총리, 교황청 대사, 헬렌 켈러 여사 등 50년대 나가이 다카시의 삶을 보고 감동을 나누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렸던 곳이다. 

도로변 길거리에 위치한 여기당은 너무나 초라한 별채 같은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피폭 당시 부상과 백혈병으로 몸을 제대로 거동도 못하면서도 용서와 평화를 갈구하는 수많은 감동의 글들이 탄생한 것을 보면, 초라하고 가난하고 누추한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며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한 성 프란시스코를 떠오르게 만든다. 역시 지하의 두세 평 작은 공간에 그의 유물이 될 만한 몇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책에서는 나가이 박사의 그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원폭 투하 당시인 8월9일 11시 2분,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강의실 밖으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의 눈부신 푸른 나무가 뒤덮인 이나사 산을 바라보던 나가이 다카시는 과연 ‘이 평화로운 광경 어디에 전쟁이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번쩍!’ 하고 빛나는 순간을 보며 앗! 하는 사이에 우라카미 일대의 땅 위에 물건이란 물건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본인도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그 와중에 병원에서 부상당한 중증 환자들을 응급치료를 해주는 동안 그는 직감적으로 아내가 사망했다는 것을 느꼈다.

 기어서 오더라도 그를 찾으러 병원에 올 여자였기에….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억제하며 의사로서의 직무를 완수하려고 응급치료를 거의 마무리하고 간신히 집에 찾아간 그의 집 부엌에는 검게 타버린 아내의 두개골과 엉덩이뼈 척추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에 흐느끼면서 우그러진 양동이를 집어들고 아내의 유골 옆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오른손 뼈마디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십자가 흔적이 남아있는 아내가 지니고 기도하던 묵주를 발견하였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흐느끼며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게 가장 소중하신 하느님, 아내가 기도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통의 어머니시여! 죽는 순간까지 신실한 아내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내의 유골을 양동이에 담았다.”

   이렇게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나가이 박사는 슬픔에 빠져 있는 대신 자신의 비극은 곧 나가사키라는 도시의 비극이며 일본의 비극이라고 생각했고, 그 책임을 군국주의 일본이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여기며 참회의 기도 등을 바로 이곳 여기당에서 글로 적어나갔다.

  그리고 나가이 다카시 바오로는 또 하나의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해 8월 15일 우라카미 성당에서의 조사에서 다카시 바오로는 말했다. “죽은 사람들과 파괴된 이 성당은 희생 제단에 번제물로 바쳐진 흠 없는 어린양이며, 슬퍼하는 자는 행복할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진정한 종교만이 과학이 푼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라고. 우라카미 성당에서의 그의 조사는 참된 신앙이 어떻게 슬픔을 이기고 승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성당에서 나올 때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시끄러웠지만, 일본의 다른 성당을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나도 반가운 복잡함이었다. 

이러한 북적거림을 보며 환하게 웃던 성물집 노 수녀님의 미소가 떠올랐다.

  성당을 나온 후 여기당, 평화공원을 거쳐 해거름에 원폭 낙하지점을 찾아갔다. 

하루종일 다닌 피곤함도 있어 벤치에 앉아 허기진 마음에 배낭 속 빵을 꺼내 먹었다. 

우라카미 성당 잔해가 벤치 앞 낙하지점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었다. 

책에는 나가이 다카시가 조사를 할 때 그 내용 때문에 많은 희생자 가족들이 울분을 토하고 비난을 했다고 적혀있다. 

마치 무슨 잘못이 있어서 희생을 당한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일 거라는 그의 조사는 분명 유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허황된 말장난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것은 400여 년 전 맨발로 나가사키로 걸어 들어와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한 사도 미끼 바오로 성인의 후손다운 고백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아리송한 그분의 조사가 머릿속을 맴돈다.

  하얀 고양이가 내 빵을 응시하며 잔해의 뒤편에서 눈에 불을 켜고 마치 혼란스러운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듯 어둠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지척에 야광으로 빛나는 저녁 시간의 성당 불빛처럼. 으스스한 기운이 어깨를 덮친다. 

이제 나가이 다카시가 기도를 드렸던 우라카미 성당의 종소리가 울릴 시간이 되었다.

댓글/Comment